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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샹바레 / 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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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비가 내리네—


 건물 밖을 나서려던 발걸음이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가면 닿는 땅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흐릿한 원을 그려냈다. 어쩐지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라니. 최근 들어 부쩍 정신이 멍해지긴 했다만, 먹구름이 그득한데 우산 하나 없이 출근했던 아침의 자신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을 어따 팔고 있는 거람.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어댔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말도 없이 손에 들린 커다란 장우산을 펼치던 그는 드렉슬러를 바라보며 얇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라스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네가 우산도 없이 왔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네.”

 “얼씨구. 대단한 예언가 납셨네.”


 작게 흘리는 그의 웃음 사이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지겹도록 덥기만 하던 계절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버렸나 보다. 정신없던 사이에. 오늘이 며칠이던가—손가락을 꼽아보던 드렉슬러는 결국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은 무슨 어제가 며칠, 아니 무슨 요일이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손을 다시 내려놓았을 때 부스럭, 하고 떨어진 나뭇잎이 밟히는 게 느껴졌다.


 “드렉슬러.”

 “응.”

 “혹시 갖고 싶던 거라든가…. 그런 거 없나?”

 “…….”


 이전부터 로라스는 종종 물어오고는 했다. 아니, 묻는다기보다는 그냥 말하는 것이었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언제든 손에 쥐여주겠다고. 다만 드렉슬러는 그의 말이 맘에 들지 않아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었고. 그 이유는 단지 비슷한 재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위에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다. 그저 알아서 해주기를 원했거나 혹은 말할 수가 없던 것이었다. 원하는 건 손에 쥘 수 있는 물질적인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그가 던지는 질문에도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걷고 또 걷던 두 다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익숙하게 보이는 집 앞 현관문에서 멈추었다. 달리 할 말이 없어 그저 잘 가라는 인사만 남기고 우산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했고, 로라스는 그런 그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

 “아니, 넌 뜬금 없이 왜 그런 걸 묻고 그러냐. 그런 게 생기면 나중에 말할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되네.”

 “왜?”

 “왜라니! 선물은 당일에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건 맞는 말이지…하고 영문도 모르고 납득하고 있던 드렉슬러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그렇구나, 미처 세지 못했던 날짜는 어느덧 달을 넘기고도 사흘이 더 지났었다, 아마도. 내가 태어난 날조차 기억하지 못해 이 사달이 나버렸구나—하고 어이없이 웃어버렸다. 어찌 되었든 최후의 소원을 털어놔야 마땅했다. 이런 날이 아니면 두 사람의 관계에 선을 긋지 못한다. 선 안에 두 사람이 있든지, 두 사람 사이에 선이 그어지든지. 다만 후자의 경우가 두려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것뿐이었고. 차라리 그럴 거면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게 낫다. 내가 원하는 건 ——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민망하니까. 


 “야…너는 본인도 기억 못 하는 나를 위해서 센스 있게 알아서 주면 어디가 덧나?”


 가슴팍을 한 대 퍽 쳤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로라스는 제자리에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물은 됐고 집이나 조심히 가. 그의 얼굴에 대고 손을 대충 흔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로라스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목을 다시 한 번 끌어당겼다. 또, 왜……,


 그리고 입술이 포개어진다. 


 분명 우산 아래로 숨어있는데 온몸이 젖어드는 기분에 손을 꽉 쥐었다. 아, 바라고 있던 게 결국 같은 거였구나. 그걸 느낄 틈도 주지 않고, 눈도 감기 전에 깊은 마찰과 함께 그가 금방 떨어졌다. 감성이란 쥐꼬리만큼도 없는 녀석 같으니. 속으로 투덜거리며 멀뚱히 얼굴을 바라만 보자 그는 예의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항상 주고 싶었던 걸 주는 거라고. 그 말에 드렉슬러는 허, 하고 마냥 웃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해, 바보야. 그러고는 떨어져 나간 그의 뒷목을 다시 붙잡으며 입을 맞추었다. 더욱 진하게, 귓가를 때리는 먹먹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슴 뛰도록. 맞닿은 입술로 호선을 그리던 로라스는 우산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드렉슬러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것이 그들의 첫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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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정확히 언제던가—는 사실 잘 기억이 안 나고, 회사에 들어오기 전 한참 방황하고 있을 시절이었다. 드라군의 용기사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면서도 우리와 같은 자들은 매 순간 불안을 느끼며 살아야 했고, 뚜렷한 목표 의식 없이 생을 연명할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영문 모를 갈증과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을 싫어했고,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도 싫었고.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내가 이걸 여태까지도 기억하는 이유는 단지 그동안 내가 의미 없는 장면의 나열이 반복되는 꿈만 꿔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녀석이 나왔으니까—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생각건대 나는 이 기억에서 정확한 부분이 거의 없다. 이 꿈도 그렇고. 하여튼 생각나는 건 주변이 아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 거기까지만 해도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꿈이었는데, 누군가 나의 손목을 탁 잡아챘을 때부터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암흑이 낮게 깔린 공간 속에서 홀로 조명이라도 켠 듯 찬란하게 빛나던 얼굴은 곧장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어라 말을 했는데, 음, 들리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나는 뭘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둠만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하늘 위로 쏟아지는 것은, 유성우. 너른 하늘에 직선을 긋고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바라보다가 그가 손목을 잡아당기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했는데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 정도. 그러고 나서 깼다.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깊은 새벽이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뛰어 내려왔다. 곧장 창문을 벌컥 열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보이는 건 그저 촘촘히 수놓아진 작은 은하뿐이었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있던 일이었다. 헬리오스에서 우리 둘을 찾아온 것은. 그러니까 그들은 로라스와 먼저 접촉을 시도했고, 그들이 다녀간 후 로라스가 내게 말을 했다.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자들이 왔다고. 대신 우리도 그들에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답잖은 서류나 업무를 처리해야한다는 것은 지극히 고리타분한 일들이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스페인에서는 보기 드문 능력자에 대한 타박 속에서 살아온 우리에게야 아주 감사할 따름인 거래였으니까. 


 사실은 그것도 로라스가 있지 않았더라면 거절했을지도 모르고.


* * *


 잔업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오늘까지 끝내지 않으면 나를 완전히 불쏘시개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조노비치의 협박에 퇴근도 못 하고 있던 밤이었다. 불면증은 사라진 지 오래였던 스물 일곱의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졸음으로 인해 책상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정신까지 완전히 잠들지는 않은 탓에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렸고, 다가온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머리 위에 앉아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그게 누구인지도 알겠고. 다만 내 몸은 이미 잠에 쩌든 탓에 반응하지는 못했다. 그냥 가만히 그가 내 볼을 만지작거리는 느낌만 선명하게 받고 있었다. 살갗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가 닿아 그대로 자 버릴 수도 있었는데, 이윽고 내려앉는 입술의 감촉에 눈을 번쩍 떴다. 


 “하하, 일어났는가.”

 “…아, 여기…안 돼….”


 물론 나는 사내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고, 대충 알아들은 그는 그저 웃으며 책상에 기대서 있었다. 


 “집에 안 가고 뭐 했어.”

 “자네가 이러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맘 편히 퇴근하겠나.”


 드디어 책상에서 얼굴을 떼어내자 그는 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주었다. 잠깐 졸았던 사이에 창밖은 완전 캄캄해져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그에게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야근하기 싫다, 일이 너무 많다, 어떻게 이런 나를 두고 조노비치는 먼저 퇴근해버릴 수가 있느냐, 내일 하면 안 될까. 중얼거리며 정수리를 만지던 손을 끌어내려 넓고 단단한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조곤조곤 나의 억지를 받아주던 그가 나의 이름을 나직이 부른다.


 “렉스.”

 “응.”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올까?”


 손에서 입을 떼자 바로 내 손을 붙잡아오던 그가 나를 잡아끌며 말했다. 아주 환한 얼굴로. 


 어쩐지 밤이 유난히 밝았다. 발길에 치이는 은색의 빛을 사그작 밟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여름밤이었는데도 살을 에는 공기가 곧 다가올 계절을 온몸으로 알리는 듯했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은 완전히 깨버렸다. 그때 그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는데 언젠가 본 적 있던 것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생경함에 눈만 멀뚱거리자 그는 입을 열었다. 저 하늘 좀 보게—그의 말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내가 그날 처음 바라본 하늘이었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놀랍게도 쏟아지는 유성의 비행이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심장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본 적 있던 얼굴과 본 적 있던 하늘과 본 적 있던 유성우. 케케묵은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내 손목을 잡고 흔드는 감각에 그를 돌아보았고, 그는 말을 덧붙였다.


 “소원, 빌어야지.”


 아.

 그래, 생각났다. 이건 꿈이었다. 꿈이었는데 그가 나왔었고, 그가 나왔었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흑백의 꿈이었다. 너는 그때 이걸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내가 소원을 빌기도 전에 잠에서 깨버렸고. 


 로라스는 그렇게 말하고선 먼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를 따라서 나 역시도 하늘에 대고 소원을 빌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로라스 녀석한테는 한 번도 말한 적 없고 별로 보잘것없는 내용이기는 해도 뭐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빌었다.


 지금의 소중한 것들을 평생 잃지 않도록 해달라고—


* * *


 물론 나의 소중한 것들은 알베르토 로라스,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다.


* * *


 널브러진 종이 위에 그려진 것들은 창의 단면도도 아니고, 어려운 수학 공식도 아니었다. 나는 어쩐지 유성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태양 궤도를 돌다가 뜨거운 열에 점차 타면서 부피가 줄어드는데, 크기가 작아졌을 때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해버리는 것이며 찰나의 순간에 직선의 빛을 내고 사라지는 소행성의 티끌 따위라는 것쯤은 다 아는 사실이라지만 이걸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내 연구에 확고한 도움이 될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몇날며칠 밤을 새우느라 눈가가 시리기는 한데 또 사무실에 처박혀 잔업을 처리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오랜 연구에 지친 나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로라스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구는 잘 돼가나?”

 “어려워. 잘만 하면 죽이는 걸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뭔지 참 궁금하군.”

 “…이봐, 알비. 너 그거 알아?”


 찻잔을 내려놓은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가끔은 감상적이 되어버려서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때인 듯하다. 온종일 붙잡고 있으니 밀려오는 감정의 조각들로 인해 얼마나 숨이 찼는지 낱낱이 토해내고 싶은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단단한 손을 만지며, 과거를 회상하며.


 있지, 나는 밤을 싫어했어. 실은 무서웠어. 아무도 없다고 생각이 들 때 나를 엄습하는 불안한 기운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싫었고, 그 위에 지들 혼자 좋다고 밝게 떠 있는 달이나 별도 다 싫었어. 내가 단순했던 거지. 그랬는데 내가 첫째로 변한 건 나를 죄여오던 압박이 사라진 것. 그건 너와 함께 이곳에 들어오고 이런 사이가 되면서부터였어. 그것까진 좋다 쳐. 둘째, 나는 여전히 밤이 싫었어. 불면증은 사라졌지만 트라우마처럼 남은 것들로 인해 꺼리게 되더라고. 그런데 그게 없어진 계기가 뭔지 알아? 너랑 밤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았던 유성우…. 아니, 사실은 필연이었을지도 몰라. 나 언젠가 그 꿈을 꾼 적이 있거든. 그때도 네가 옆에 있었고. 그리고 나는 깨달았어. 밤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래, 좀 더 정확하게 말해줄게. 나는 그저 너와 함께하는 그 순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걸 거야. 이제 나는 밤을 좋아해. 별은 더 좋아하고. 무슨 연구를 하느냐고 물었지? 나는 나의 소중한 추억을 담은 끝내주는 창을 만들 거야. 벌써 이름도 지었어. 유성창이라고. 


 말을 끝맺었을 때는 내가 만지고 있던 손이 되려 나를 잡고 있었다. 여전히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았다. 그저 푸른 시선을 마주하기만 했다. 맞잡은 손을 펴더니 깍지를 끼고 잡았다. 닿은 살가죽의 작은 혈관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침을 한 번 꿀꺽 삼켰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네는 그때 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아나?”


 질문을 던지고는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소원에 관해 물어본 적도,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넘치는 자신감으로 인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일까. 코앞까지 다가온 로라스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고, 그의 말에 나는 그저 작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입술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아, 그래서 그가 말한 소원이 뭐였느냐면, 바로 이거였다. 


 —소중한 것들을 평생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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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추억할 것이 많은 대상이란 늘 가까이에 있는 법이었다. 낡은 축음기에서 긁혀 나오는 노랫소리에 떠오르는 사람 또한 짧지 않게 살아온 생을 가득 채워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대했던 것만큼의 커다란 변화라는 것은 없었다. 그저 그렇게 자라났을 뿐이고, 조금씩 나이를 먹었을 뿐이고. 형과 아우라는 틀 속에서 스무 해를 넘게 살아온 거고.  

 이글은 수많은 장면들 중 하나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나직한 목소리가 읊는 이야기와 나른한 음악 소리가 섞여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풍경.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조용히 눈을 감았었지. 그러면 너른 이마 위에 차가운 손이 다가와 머리를 쓸어내려주곤 했다. 

 눈을 떴다. 비눗방울과도 같은 기억들이 폭폭 터져 허공에 흩어진다. 안갯속에 갇힌 우리에게 커다란 변화라는 것은 없다. 달라진 것도 없다. 나이를 먹든, 어른이 되었든. 그저 형제라는 이름에 묶여 서투른 감정조차 묵인해야 하는 사슬과도 같은 관계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냐, 이글.”

 “조금만 더 빌려줘.”

 가끔은 아무 말 없이 어떠한 이유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한참을 만지작거리고는 한다. 그의 삶을 전부 이야기하는 투박한 손. 상처가 그을리고 굳은살이 틈틈이 박혀있는 손. 그 손에 이마를 갖다 댔다. 여전히 차갑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형의 손은 차갑고 크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는 항상 씁쓸한 계피향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뱉어냈다. 이 음악을 들으면 그가 생각나듯 그를 떠올리면 이 음악이 자연스레 귓가에 맴돈다. 변함없이.

 기적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ㅡ하고 가끔 묻고는 했다. 누구에게 묻느냐 하면 아무 대상도 없었다. 다만 세상의 끝에 다다르면 언젠가 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에 맘을 기댈 뿐이었다. 어쩌면 그때는 정말로 변화가 찾아올 거라고. ㅡ형과 나 사이를 잇는 끈에. 




(진님에게 축전으로 드렸습니다><)

TEXT/Cyp

1.

 제일 찬란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귓가를 두드려댔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구름이 해를 가려 몇 시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세상 앞에 시선을 가로막은 나는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사이로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였다. 그 개수를 헤아리다가, 헤아리다가 마치 참아내고 맘속으로 흘려보낸 내 눈물 같아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몇 개였더라ㅡ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꼬마야, 길 잃었어?”

 단절된 세상 속에 이방인이 끼어들었다. 고개를 들자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대답 없는 침묵. 빗소리가 내는 정적 속에 그 누군가는 다시 한 번 내게 말을 걸며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잘 모르겠지만 이쪽이 훨씬 보기 좋을 것 같은데.”

 닫아버린 앞머리의 가운데를 가늠하여 두 손가락을 찔러넣고는 그대로 갈라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아, 언제부터 태양이 저기 있던가. 노르스름한 빛을 구워내는 하늘 아래로 나의 구원이 크게 미소 짓고 있었다.



2.

 정의할 수가 없는 관계. 항상 최대의 게이지까지 차오른 습기와 뼈를 아리는 냉기. 너는 한여름 태양처럼 뜨거운 사람이었음에도 우리 둘 사이엔 알 수 없는 장마가 계속되었다. 그것은 슬픔이나 애환 따위가 아니었다. 끝내 찾아오지 않는 봄에 관한 것이었다. 결코 나아지지 않는 서투른 표현력 때문에 애매한 선상에서 어느 한쪽으로든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연인이거나 혹은 친구이거나.

 그러나 결국은 그 무엇도 아니게 되어버린 너와 나.



3.

 다음으로 최후의 기억을 떠올린다.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이 살살 불어오는 날이었다. 나는 너의 목에 얇은 털목도리 하나를 매어주었다. 어린아이처럼 툴툴대면서도 거울을 보며 다시 고쳐 매는 네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게 피어오른다. 그날은 네가 이국의 땅을 밟기 위해 집을 나서는 날이었고, 나는 그런 널 배웅하겠다는 작은 의지 하나로 굳이 네 집에 머물러 있었다.

 난 지긋지긋한 레이스에 선을 긋고 싶었기에 네게 이렇게 말했지. 긴 여행에서 돌아오거든 할 얘기가 있노라고. 그것은 계속하여 살을 누르는 끈적한 습기를 떼어내려는 나의 발악과도 같았다. 겉으로는 평온한 척, 별일 아닌 것처럼 말을 뱉는 와중에도 마음속엔 태풍이 휩쓸고 갔다. 그럼 너는 역시나 평소의 얼굴로 알았다는 대답만을 남겼다.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선 너는 그렇게 뒤돌아 가버렸다. 애가 타도록. 너의 떠난 뒷모습을 눈 안에 따갑도록 집어넣고 나니 어느새 점이 되어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4.

 나는 오늘도 집 앞에 서서 네가 점이 되어 사라졌던 골목 너머를 들여다본다. 바람이 불자 가운데로 가른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뒤늦게 펼친 우산 위로 빗방울이 튕기는 소리, 바람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수증기가 고막을 짓누르는 소리, 그리고 침묵. 멎어간다. 아침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맴돈다.

 오늘 오후부터 며칠 동안 계속되었던 비가 멈추겠으며, 이후로 맑은 날씨가 전망됩니다. 또한, 비가 갬과 동시에 기온이 상승하여….

 “알베르토!”

 …그리고 침묵이 깨짐과 동시에 저 너머에서 봄이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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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정확히 언제였더라. 거의 가물가물할 정도로 어릴 적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도 철없고 개구져서 그 커다란 저택 안을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날은 아마도 귀찮아하는 형들을 붙잡고 숨바꼭질을 하자고 내가 먼저 졸라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우습기도 한데, 나는 내 발목에서 잘리는 커튼 뒤라든지, 이불 속에 들어가면 아무도 나를 못 찾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서 들켜버렸을 때의 패배감이란! 난 계속해서 금방 잡혀버리는 게 슬슬 화가 났었는지 큰형이 술래였던 차례에 제대로 작정을 했다. 


 “여기 들어가면 모르겠지?” 


 나는 조그만 몸뚱아리를 큰형의 방에 있던 옷장 속에 집어넣었다. 문을 닫기 전 보았던 것은 창문 사이로 어둑해진 빛이 연약하게 기어들어 오는 풍경이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옷장 안은 그 어느 것보다도 아늑했다. 푹신한 옷감과 키에 딱 맞는 너비까지. 하품을 쩌억ㅡ하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막 떴을 땐 내가 어디에서 잠들었던 건지도 기억이 안 나서 한참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러다가 전부 기억해낸 다음은, 이미 기괴한 바람 소리며 덜컹거리는 옷장이 나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콰쾅. 하늘을 가르는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쳐댔다. 놀란 나는 다급하게 문을 발로 찼으나 허사였다. 분명 안에서는 잠근 기억이 없는데, 아니 잠글 수조차 없는데 굳게 잠긴 옷장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빗장이 저 혼자 잠긴 것으로 결론이 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나를 곯려주려는 형들의 장난인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형들이 그럴 위인들이 아닌데…! 계속해서 발로 차고 주먹을 쾅쾅 내려쳐도 소용이 없었다. 슬슬 나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아, 이건 얘기하기 쪽팔리니까 그만. 하여튼 나는 발버둥 치기를 그만두고 두 다리를 끌어모아 누군가가 와주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만 했다. 형…. 형…. 하면서. 그러고 나니까 글쎄….


 “귀찮으니 심심하면 나가서 일이나 구해라, 이글.”

 “아, 글쎄! 나는 일 같은 건 싫대두.”


 의자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내가 빤히 쳐다보는 게 내심 신경 쓰였는지 미간을 바짝 세우며 약간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서류를 한 장 넘겼다. 그러게 외근 나가는 장소를 나한테 알려주면 안 되지. 나는 형 일 할 때면 꼭 방해하고 싶단 말이야. 아이구, 콧등에 뭐가 떨어진 것 같은데….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어둡다더라니 구름이 잔뜩 껴서 햇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말썽이군. 다시 시선을 형에게로 옮겼다. 어라, 근데 형이 사라졌다?


 “이글. 난 손님이 왔으니 혼자 놀든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든지 알아서 해라.”

 “아아, 형 잠깐~!”


 마시고 있던 커피도 제자리에 남겨두고 다른 테이블로 가버리는 등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부터 저렇게 등이 넓었담.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남기고 간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가 그대로 뱉어버리고 말았다. 꼭 자기처럼 쓴 것만 마셔서는….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왔다. 할 일도 없고, 누굴 만나기도 귀찮고. 연합으로 돌아가려니 영 구미가 안 당기는 것이다. 술이나 마실까 하며 생각 없이 길거리 여기저기 떠돌기를 반복하다 보니 또 한 번 이마에 차가운 것이 똑, 하고 떨어졌다. 아아, 그러지 마. 우산도 안 가져왔단 말이야.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꼭 빗나가질 않는다. 발밑을 조금씩 물 들이더니 옷이며 머리가 젖기 시작한다. 목 언저리가 콱 막혔다. 지끈지끈. 재수 없게도 오래 전 몸에 벤 것이 이 나이 먹도록 흩어지질 않는다, 젠장….


* * *


 모르겠어.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린 애도 아니고 비가 닿지 않는 구석에 숨어 빗방울 철썩이는 바닥만 하염없이 보고 있는 것을. 비는 그칠 생각이 조금도 없나 보다. 오히려 더 오면 더 왔지. 그냥 비 맞고 돌아갈까 싶어도 빌어먹을 다리가 일어나질 않았다. 짜증 나…. 옷장 안에 갇힌 소년처럼 다리를 모으고 쭈그려 앉았다. 이러고서 주문을 외워볼까. 쓸데없단 걸 알면서도, 미련하다는 걸 알면서도 맘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데서 숨어있으니 한참을 찾았잖느냐, 이글.”

 “어…?”


 푹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것은 쏟아지는 비를 배경 삼아 곧게 서 있는 큰형이었다. 뭐야, 주문이 실제로 효과가 있던 거야? 그런데도 속으로 계속해서 외쳐댔던 “형.”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어떻게 알고 온 건데. 매정하게 버리고 갈 땐 언제고.”

 “일부러 금방 끝내버렸다. 너는 비가 오는 날이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

 “내가 있어 주지 않으면.”


 형은 참 못됐다. 꼭 이럴 때만 곁에 있어 주려 하니 내가 못된 생각을 고쳐먹을 수가 없는 거다. 형이 손을 뻗는다. 우산을 벗어난 투박한 손 위로 빗물이 세차게 철썩였다. 마치 저 손에 그득한 흉터들이 비로 인한 것처럼. 그 손 위로 내 손을 겹치자 꽉 붙잡고 자기 쪽으로 당겨버렸다. 힘 참 오지게 세네…. 그 덕에 하마터면 안겨버릴 뻔했다. 어쩜 나는 그걸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티 내지 않는 걸로 한다. 내가 우산 속으로 완전히 들어온 걸 확인하던 형은 이내 말없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보폭에 맞춰 빗물을 첨벙거리며 최대한 철없는 아이처럼 따라 걷기만 했을 뿐이고.


 참, 그러고 보니 아까 얘기해주던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마저 끝맺지 않았었지. 음 그러니까…내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애타게 형을 부르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빗장이 철컥, 하고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벌컥 열리자 보이는 것은 큰형이었다. 나는 혼날 줄 알았다. 남의 방 옷장에 함부로 들어오더니 안에 갇혀서 질질 짜고 앉아있었으니. 더 이상 형을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훌쩍였다. 억센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기에 아, 이제 한 대 맞겠구나 싶었는데 그대로 질질 끌려 나온 나는 형의 품 안에 폭 하고 안겨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형이 나를 안아준 거겠지. 형은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자세로 한참을 다독여주었다. 완전히 긴장을 놓아버린 나는 결국 펑펑 울어버렸고.


 맞다, 울었단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난 여전히 비 오는 날을 죽도록 싫어하게 돼버렸다. 무서운 건 아니어도 한없이 무기력해져 버린다. 그래도 형이 이렇게 있어 준다면야…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묵묵히 옆에서 우산을 들어주고 있는 지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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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꽤 진부하고 이해하지 못할 것들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에는 미적지근한 감정이었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애물단지. 사람을 그렇게 비유하는 것은 못된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힘들여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정도는 아니고 또 그렇다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는 건 못마땅한 정도. 엄청나게 사랑하지도 그렇지만 또 아무 감정 없는 것도 아닌 정말 말 그대로 미적지근한 온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우습게도 나의 첫사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알베르토 로라스의 모습은 이러했다. 굉장히 선량하고 정의를 추구하지만 융통성은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든 남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면서도 남에게 피해주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남자. 말수가 적고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있으나 의외의 부드러움을 품은 남자였다. 갈수록 단단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어정쩡한 짝사랑을.


처음에는 이런 별거 아닌 감정이라면 얼마 안 가 식어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2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의 한계선을 위아래로 정해놓고 일정 시기마다 그사이를 반복하는 것이 흐름이었다. 결코 그 선을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그 이상으로 가슴 뛰는 일도 혹은 그 이하로 사그라지는 경우도. 

이미 꽤 많은 말들을 적어버리긴 했다만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로라스를 홀로 좋아한 것은 한 10년은 되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시콜콜한 연애담이 허구는 아니란 말이다. 솔직히 나 역시도 아무개가 누구누구를 11년간 짝사랑했었더라ㅡ는 이야기를 듣고 한 치도 믿지 않았었으니.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무턱대고 미래에 확신을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이고. 

어쨌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그사이에 제일 녀석을 사랑했던 시기는 끝 무렵이었다. 농익은 사과처럼 끝자락에서야 붉어지는. 수년이 지나는 동안 내게도 다른 연인이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 사람을 만나면서도 마음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 정도. 물론 이 감정에 대해선 그 누구에게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로라스에게조차. 맘을 접을 때나 돼서 제일 사랑했다는 것은 사실 미화된 말이다. 맘을 접어야만 해서 더욱 그에 대한 소유욕이 커졌을 뿐. 


아마도 그에게 나만큼이나 편하고 의지 되는 상대는 더 이상 없었을 거라 예상한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결혼 사실을 제일 먼저 알린 것 또한 내가 제일 처음이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어떠한 축복도 해줄 수 없었다. 한동안은 혼자 집에 틀어박혀 술을 퍼다 마시기도 했다. 언제까지나 내 손 안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가, 한순간에 흩어져버려 다른 누군가에게로 떠나가다니. 

…젠장! 사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데도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 화가 난다. 왜 그토록 많은 시간을 지냈으면서 단 한 번도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는지. 왜 사랑에 관해서는 게을러 빠졌던 것인지. 왜 그렇게 방심했던 건지! 

아,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한계치를 벗어나 흘러넘칠 듯 말 듯하다가 그대로 가라앉은 것은 그의 결혼식을 치른 후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쯤이었다. 포기하면 편하다, 라. 애초에 포기할 것이 있었는가. 그가 내 곁에 머물러 있다는 이기적인 착각에 시작조차 못 했던 관계였는데 내게 포기라는 단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느냔 거다. 수많은 생각을 거치고 나니 어느새 그를 갈구하던 감정은 식어빠진 한 잔의 커피가 되어있었다. 

한숨에 꿀꺽, 삼켜버렸다.


* * * 


“다리오 삼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뭘 묻고 그래. 노총각 삼촌 앞에서 그런 거 꼬치꼬치 캐묻지 마.”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꼬물거린다. 꼬마숙녀에게는 너무 무거운 얘기는 빼고 들려줘야겠지. 애초에 내게 먼저 그런 질문을 꺼낸 것부터가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안젤라. 너 학교에 좋아하는 남자애 있냐?”

“…어, 없어요!”

“쪼끄만 게 벌써 연애질해?”

“아직 안 해요! …아, 아니 그게….”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못 한다. 고작 열 살배기인 그녀ㅡ아니, 열한 살이던가ㅡ의 순수한 애정에 때가 들러붙지 않도록 그러나 지금이든 나중에든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슴없이 표현하라고. 놓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어떻게든 쟁취해버리라고. 사랑에 있어서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고.


“삼촌은 이기적이지 못해서 첫사랑을 놓쳐버린 거예요?”

“그래, 인마! 그니까 나처럼 되지 마.” 


무슨 말을 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내내 싱글벙글 웃으며 바닥에 놓인 스케치북에 알 수 없는 그림을 마구 그려댔다. 나는 간혹 이 발랄한 계집애가 누구의 딸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꼭 제 아빠를 빼닮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얇은 웃음을 지었다. 잠깐의 침묵 사이로 문소리가 끼어들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아이가 금세 또 찢어질 듯 웃으며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버지!”

“삼촌이랑 뭐 하고 있었어?”

“다리오 삼촌이 첫사랑 얘기해주고 있었어요.”

“야, 무슨 그런 얘기를!"


너무나 당당하게 폭로해버린 탓에 당황하고 말았다. 허겁지겁 로라스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애초에 볼일이 있던 것은 그의 딸이 아니라 본인이었으니까. 다른 말을 돌려가며 복도를 걸었다. 용맹한 그의 가문에 걸맞은 호화로운 장식이 눈길에 채인다. 우습다. 한때는 익숙했던 것들이 나와 남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니 거북해지고 만다.

놀랍게도 나는 아직도 그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했다. 다만 나조차도 잊고 살 정도로 죽이고 살 뿐. 그를 빼닮은 딸과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것은 오래전의 추억이 잔상처럼 겹쳐지기 때문이었고, 때때로 찾아오는 것은 가끔씩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해내면 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근데, 렉스.”

“응?”

“생각해보니 내게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지 않나.”

“…뭘?”

“자네 첫사랑이라든지.”

“…….” 


빌어 처먹을 심장아.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멋대로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괘씸해서 한 대 쳐버리고 싶다. 그리고 울컥한다. 오래도록 좋아했지만 나까지 의아할 정도였던 모호한 감정의 경계. 그 주인이 누군가까지에 대해 너에게 전부 쏟아내 버린다면 아마 우리에겐 이 이상의 미래마저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 죽을 때까지 내가 비밀로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줘. 


“없어, 그런 거.”


없었다고 나 스스로도 매일같이 최면을 건다. 이렇게 딱 잘라 말한다면 아마 너도 미련없이 이 이야기를 잊어버리겠지. 다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단 하나. 만에 하나. 혹시라도 너 역시 내게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언젠가 또 내게 같은 질문을 해오겠지. 

그때는 내가 대답할 수 있을까. 내 첫사랑은 바로 너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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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밤이 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불현듯 찾아온 감정의 전조를 느꼈던 시기와 맞물린다. 하루 중 잡스러운 생각이 가장 지배적인 시간에 잠들지 못하는 일이란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의 방문, 그리고 그걸 떨쳐내지 못하는 정신. 가히 천재라고 불리는 그에게도 그것은 멋대로 조절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 사람은 제 마음에 솔직해지기가 어려운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아, 물론 지금은 역시나 밤이다. 하나의 생각이 다른 것으로 정처 없이 흐르다가 결국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감정을 멋대로 휘두를 수가 없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마는 것처럼. 


 “아이씨!”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시계는 어느덧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 새벽바람 차가운 줄 모르고 무턱대고 밖으로 나섰다가 소름이 오소소 돋아버렸다. 겉옷이라도 챙길걸ㅡ하고 투덜거리면서도 발을 돌리지는 않았다. 고요함이 세계를 집어삼킨 듯해서 어쩌면 세상에 혼자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닥에 걸음을 내딛는 소리. 이 삭막함이 싫지 않아 발걸음을 죽이며 앞으로 나섰다. 

 호숫가의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깊게 박혀 있다. 


 “너는 나랑 좀 멀어질 때가 되지 않았냐.” 


 들어줄 리가 만무한 것들에게 ㅡ애초에 그럴 수 있는 존재도 아니지만ㅡ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아주 익숙한 듯. 어차피 돌아오는 것은 무엇도 없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놀랍게도 그것이 대답했다.


 “내가 뭔가 잘못했는가…?”

 “응…아!?”


 더욱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이렇게나 큰 덩치를 가진 남자가 어찌 아무 인기척도 내지 않고 바로 옆까지 걸어올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조금 퀭한 눈을 한 로라스는 난감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너 말고.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드렉슬러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자기 완전히 글러 먹었다고.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일부러 바람이나 쐬려고 나온 건데 불면증의 주범과 마주쳐버리고 말았으니. 


 “이 시간에 왜 잠도 자지 않고.”

 “아아, 그게 말이야. 요즘 통 잠이 오질 않아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아니….”


 옆자리에 그가 앉았다. 아, 또 한 번 가슴이 일렁인다. 숨을 꿀꺽 삼켰다. 언제부터 이 감정이 시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외면하려고 해도 비워내려고 해도 정말 한 순간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심드렁한 체하며 슬쩍 눈동자를 돌려 그의 곧은 얼굴을 훔쳐보는 것이 전부였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건조한 바람과 은은한 빛을 받은 그의 옆선이 반짝였다. 


 “기억하나? 어릴 적, 한참 내가 악몽에 시달리던 때 무섭다고 울고불고 달려가니까 자네가 베개를 끌고 와서 옆에서 같이 자면서 지켜주지 않았나.”

 “…그런 적도 있었나.”

 “난 잊을 수가 없어. 며칠 그러고 나니까 거짓말같이 몽마가 떨어져 나갔거든.”

 “…….”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릴 적을 생각하면 더욱 그래. 마냥 겁쟁이 같고 참 순진한 탓에 이래서 언제 남자가 되나 싶었던 그가 제 키를 넘기면서 어느 한순간부터 듬직한 남자가 되는 걸 모두 지켜보았으니. 어쩌면 그가 변했음을 느꼈을 때가 그 시작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음에 올 말이 무엇일지 짐작 가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멋있을 걸 아니까. 지나치게 과묵한 주제에 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을 쳐대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얼굴과 표정을 보지 못하면 후회하고 말 것 같아서 떨리는 맘을 욱여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내가 곁에 있어 주겠네. 무섭지 않도록.” 


 틀렸어, 인마. 나는 무서운 게 아니야. 귀신이나 악몽 따위로 두려운 게 아니란 말이야. 어둠 속에서 달아나버리는 잠과 다투며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달콤한 꿈 이런 게 아니고, 그저 네놈과 좀 더 가슴 뛰는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그런 거라고. 넌 알긴 아냐. 내가 왜 매일 같이 잠을 설치는지, 바보 같은 놈….

 ㅡ그치만 역시 그와 마주한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가슴 뛰도록 잘생긴 그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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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소독약 냄새가 코를 은근 찔러댔다. 문을 조심스레 열자 기다란 그림자가 바닥을 가득 메웠다. 조용한 떨림이 공기 중으로 흩날렸고, 시선은 한곳으로 향했다. 곧게 누워 눈을 감은 남자는 지나치게 평온한 표정이어서 지금 이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끔 만들었다. 침대 옆쪽에 놓인 작은 의자에 힘없이 앉았다. 

 옷깃 사이로 비치는 붕대 위로 비릿한 잔상이 겹친다. 마지막에 기억나는 것은 정신이 희미하게 꺼져가던 찰나였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것이 선혈인지 빗줄기인기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한 차례 피를 토해내고 일찍이 세상에 안녕을 고하며 제 눈앞에 떨어지는 날카로운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남자가 흐릿한 시야를 완전히 가려냈다. 무어라 말을 하던 그의 굵직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목구멍 끝에 아슬하게 매달렸던 숨을 삼켜냈다. 정신이 픽- 하고 끊겨버렸다.

 티엔이 저를 대신하여 끔찍한 사단을 맞이했더라는 것은 수일이 지난 후에야 전해 들었다. 몸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나아가고 있을 때쯤이었고 그게 바로 오늘이었으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걸음에 내달려 온 것이었다. 

 회상을 마치자 갑자기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아니꼬운 목소리로 대했던 지난 시간들이 밀물처럼 가슴을 쳐댔다. 이유 없는 질타와 어리석은 태도. 그런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그에게 왜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을 구해준 이유가. 그러나 굳게 다문 입술처럼 닫혀있는 눈은 조그마한 동공조차 보여주질 않았다.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하듯이.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질끈 감아버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열었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쇠처럼 갈라져 날카로웠다.


 “왜 그랬나요, 티엔? 나처럼 이기적인 놈 때문에 왜 그랬어요? 나는 매일같이 당신에게 못된 말을 내뱉고 못된 생각만 했는데….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며 짜증 내고 단둘이 있기만 하면 숨이 막힐 것 같아서. 근데 그거 아세요? 나 사실 당신을 싫어하지 않았어요. 마치 어린 애들처럼 말이에요…. 어린아이들은 누군가를 좋아하면 오히려 더 투덜거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 사실 내가 당신을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가깝다는 걸 저조차도 뒤늦게 깨달았어요. 왜냐구요? 당신은… 내가 제일 순수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어차피 속을 읽을 수가 없기에 이해타산을 따져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복잡하게 관계를 이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도 당신을 마주할 때마다 표정을 찡그리고 나쁜 맘 먹었던 것 너무 미안해요. 난…아직 많이 어린가 봐요. 티엔…내가 정말….”


 목소리에 습기가 가득 찼다. 고해하듯 혹은 변명하듯 줄줄이 뱉어내는 말들이 다시 제게 돌아와 가시처럼 박혔다. 그때 익숙한 감각이 침대에 고이 올려놓은 두 손에 느껴졌다. 단단하고 거칠지만 따뜻한 손. 고개를 들어 올리자 티엔이 어느새 눈을 옅게 뜨고 있었다. 아주 곧고 깊은 눈으로. 전부 다 듣고 있었나요? 그에게 물으면서도 차마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이렇게 눈을 떴는데. 깊숙한 상처를 몸에 지니고서 힘겹게 깨어난 그에게 흔한 미소조차 줄 수가 없을 만큼 맘이 아팠다. 그러나 티엔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깨지는 침묵.


 “아직은 많이 어리광부려도 된다. 내가 받아주면 되지 않나.”

 “티엔….”

 “그러니 저번처럼 죽으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마라.” 

 “…….”

 

 얼굴이 뜨거워졌다. 쏟아지는 눈물이 마치 그날의 폭우 같아서,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맙다고ㅡ 말하고 싶지만 목구멍 끝까지 숨이 차올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붙잡은 그의 손에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그럴수록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애써 숨을 죽이며 그에게 해야 할 말을 골라냈다.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보다도 더욱 궁극적이고 순수한 말ㅡ좋아해요, 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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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차라리 조금 더 쏟아져 내리면 좋았을 것을. 어두운 하늘에 빛 하나 비치지 않게끔 잔뜩 가려놓고서는 고작 흐르는 눈물 하나 감추지도 못할 만큼밖에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나고 난 공허한 자리, 일생을 그 하나만 바라봤던 이름이 새겨진 돌덩이를 보며 다시금 목울대가 일렁이는 것을 삼켜냈다. 당신을 닮은 무엇 하나도 이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목을 메이게 해.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 앞에 놓인 하얀 꽃이 빗방울을 맞으며 처량하게 젖어있었다.


 당신은 줄곧 말했지. 정작 제일 떠나고 싶은 곳은 닿을 수가 없는 세상이라고. 그는 높은 곳에 올라 밤하늘을 바라보길 좋아했다.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며. 어두운 하늘 위를 수놓는 별들을 보며 언젠가는 저 별에 다가가고 싶다 했다. 

 빛보다 빠른 남자여, 타키온. 너는 아마도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쉽게 별을 여행할 수 있는 남자였을 것이다. 자유로이 세상을 떠돌고 살아온 세월에 비해 무구한 감성을 품었으며 소박하지만 큰 포부를 지녔었지. 그러니 지금쯤은 그토록 원하던 땅에 발을 디뎠을지도 모른다. 비구름이 가득한 저 너머에 여느 때처럼 푸르른 문을 열어두고 공기를 가볍게 밟아 여행하고 있을 터였다. 


 소멸해버리는 것. 문득 생각하니 당신은 별을 닮았어. 특히나 어떤 별을 닮았느냐 하면 누구나 아는 이름을 달고 유별나게 환한 별보다는 그 옆에 은은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닮았다. 흘러가듯 순탄한 세월을 지나 끝끝내 조용히 사라져버리는. 그 아무도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채 어느새 소멸하고 세상에 부대끼는 먼지가 되어버리는. 그렇지만 어느 순간 또 다른 별의 일부가 되어 세상의 빛을 보겠지.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당신과 다시 만나고 싶어. 조금 더 복잡하지 않은 관계로. 세상은 평화롭고 막힐 것이 없어 일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소소한 웃음만으로 가득 찰 수 있을 때. 이번 생만큼 의지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의 질긴 인연을 가지고서. 그때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지금까지 내게 보여주었던 빛을 그대로 머금은 채 만나길 바라네, 

 타키온,


 릭 톰슨, 사랑했던, 앞으로도 사랑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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