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평범한 시민이었던 릭 톰슨에게는 별 볼 일 없는 소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유유히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인즉슨, 크고 작은 특별한 일 없이 무난하게 생을 보내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다 가끔 싫증이 나면 쌓아놓은 휴가를 내어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자주 발을 들이지는 않는 펍을 찾아가 약간의 음주를 즐기는 것 정도는 허락하곤 했다. 서른이 넘는 생 동안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엔 그다지 튀지도 않으면서도 유순한 성격으로 학우들과 곧잘 어울리며 별 탈 없이 졸업을 했고, 원하던 공부를 적당히 하며 대학에 다니다가 어느 정도 제 수준에 맞는 회사에 취직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보면 오히려 성공한 인생이라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랬던 그의 이상에 균열이 생긴 것은 한 남자를 만나고 난 후였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의 얼굴에 흐르는 귀티를 보며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지레짐작 알 수 있었다. 항상 적당한 수준의 안팎을 오르내리며 살아온 릭에게 그는 절대로 과분한 사람이었고, 딱히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비즈니스를 위한 만남일 뿐이었으니 숨통이 꽉 막힐 듯했던 대면 이후로는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만, 우습게도 릭은 또다시 그와 마주 앉아 도톰한 스테이크를 썰어대고 있었다.
…더 나아가자면, 현재의 두 사람은 한마디로 정의해서 연인 사이였다.
“하아…이런 곳은 딱 질색이라고 몇 번을 말했잖소.”
“먹여주는데도 불만인가.”
“그런 문제가 아니잖소. 익숙하지가 않단 말이오.”
고깃덩이를 입안으로 구겨 넣는 와중에도 툴툴거리는 것이 곧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시민과 같은 삶을 살았던 릭은 이런 호화로운 광경을 굉장히 거북해 했다. 그랬던 그가 유럽계 대기업의 자제인 벨져와 연애를 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놀라울 정도로 만남이 계속되었고, 속은 주체할 수 없이 울렁거렸으면서도 어깨너머까지 고운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를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미래의 감정을 예견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콰지직. 균열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그를 보며 가슴이 갈라질 듯 뛰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 테지. 그를 만날 때마다 평범함을 꿈꿨던 이상은 조금씩 무너졌다. 그 대신 우아한 음악 내지는 고풍스러운 외벽의 건물들, 그리고 한입에 수십 달러는 족히 넘을 값비싼 음식들까지, 이런 모든 것들이 릭의 새로운 세계 안으로 침투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걸까. 핏기가 감도는 고기 살점을 포크로 쿡쿡 찔러대며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어차피 돌이킬 수도 없는 과거였지만.
“앞으로는 내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필요 없소. 이럴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드는지는 알기나 하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당신에게 이렇게 거대한 선물을 받을 때마다 말이지, 나는 여태까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지난 과거가 실은 한심한 시간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단 말이오. 그리고 아무리 당신에겐 별거 아닐지는 몰라도 난 주는 것이 없는데 받기만 하니 내 맘이 얼마나 답답한지…!”
“…그리고 더 할 말은?”
“끄…끝이오….”
머쓱하게 뒷목을 매만지며 곁눈질을 했다. 그는 맞은 편에 앉아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옥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얽히는 순간 얼굴이 뜨겁게 타들어 감을 느꼈다. 처음에서부터 느꼈듯이 찬연한 빛이 나는 벨져 홀든은 여전히 자신에겐 과분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당신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그렇지만 이것 정도는 알아둬.”
“무엇을?”
“딱히 내게 무엇을 해주려는 생각은 마라. 나에겐 당신을 만난 것 자체가 선물이니까.”
말을 아끼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 또한 그랬다. 꼭 그 주인을 빼닮아 고운 목소리로 낯간지러운 말을 별거 아닌 듯이 내뱉기도 했지. 처음 고백을 받았을 적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꼭 균열이 생긴 틈 어딘가에서 차가운 콘크리트를 뚫고 작은 꽃들이 피어났다. 어쩌면 너무 틀에 박힌 인생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이런 화려한 모양새는 역시나 몸에 배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그의 말처럼 그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큰 선물이지 않았을까. 다른 누군가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법한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있는 저 남자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