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떠올릴 때면 항상 버석한 풍경이 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짧은 시간 함께했던 기억들이 눈가에 걸리는 잔상처럼 흩날렸다. 그것은 지금의 익숙지 않은 공기들이 제 피부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선혈을 뿜어내던 어깨가 규칙적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짙은 밤나무 냄새가 드리운 작은 공간 속에 앉아있는 릭 톰슨의 어깨 위로 창가를 통과하는 햇빛이 쏟아졌다.
루사노로 향했던 여정 이후로는 꽤 오랜만이었다. 그 사이에도 전쟁은 시작과 끝의 사이 어딘가를 계속해서 내달리고 있었다. 매번 찾아오는 고비에 다다를 때마다 자꾸만 머릿속에 이명처럼 울리는 목소리 때문인지 지겨운 목숨을 겨우 지지부진하고는 했다.
"이렇게 오랜만에 무슨 일로 찾아온 거요?"
꽤 오랫동안 제 정신을 갉아먹었던 목소리는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더 부드러웠다.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의 표정 역시도.
"부탁…이라기보다는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
"전쟁에 관한 거라면 지금은 좀 곤란하오."
"그런 건 아냐."
책상 위로 가득 쌓인 종이들을 툭툭 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황에 맞지 않게 홀로 안정감을 독식하며 지내는 그를 굳이 다시 끌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제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려는 것이리라. 무엇보다도 기억 속에 제멋대로 그려놓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좋은 낯빛을 띄고 있었으니까.
"다시 함께 여행을 가고 싶어."
"여행이라니, 무슨…?"
"몇 년 전처럼 싸움을 위해 가자는 게 아니라 나도 가끔은 휴식이란 게 필요하니까."
톡톡톡. 어설프게 자란 손톱으로 책상머리를 건드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기억 어딘가에 지금과 같은 얼굴을 한 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윽고 어깨를 맞대어 동행해준 것도. 짧은 시간 경험했던 그를 회고하면 거절할 이유는 무엇 하나 없다고 확신했다.
"굳이 나를 찾아온 게 내 능력이 필요해서 그런 거요, 아니면 내가 필요해서 그런 거요?"
"이전에는 전자였다면 지금은 후자에 가깝지."
"하핫, 그대 어지간히 친구가 없나보오. 회사까지 찾아와서 부탁할 정도라니. 그치만 아껴둔 휴가를 좀 쓰면 아주 안 될 일도 아니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했다. 그의 웃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면 감정이 파도치는 것은 몇 년째 그대로였고. 시선을 거두었다. 아직은 제 마음을 옭아매는 릭에 대한 실타래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푹 꺼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든 좋으니 날짜가 정해지면 전보를 부쳐줘.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무로 된 바닥에 벨져의 발이 닿을 때마다 끼걱거리는 소리가 그 발걸음을 붙잡듯이 무거웠다. 혹은 릭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은 아닌지, 엉뚱한 생각에 바닥을 힐끔 쳐다보았다.
"함께 동행 했던 시간이 자꾸 기억 나서."
"음?"
문을 열다 말고 뜬금없이 말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흰 셔츠에 넥타이를 정갈하게 맨 그 말쑥한 모습을 머릿속에 담아내려고 굳이 몸을 돌려세웠다. 다시 손에 펜을 쥐어 잡던 릭이 놀란 눈을 했다.
"그래서 찾아왔어."
"…감사하오."
벨져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제 감정을 숨기며 냉소함에 젖어들어 내면을 쉬이 들여다보기 어려운 그런 사람. 그렇지만 어쩐지 릭을 마주하면 유난히 진솔하고 단순해져 버렸다. 그를 바라보며 전에 없던 엷은 미소를 흘리는 것은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이리라ㅡ그런 생각과 함께 섬광같이 문 뒤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