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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3!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혹은 어쩌면 오래도록 바라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츠무기는 깨어난 자세 그대로 누워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툭툭 끊긴 기억들 사이로 몸을 찌르는 감각이 다시금 피어오른다. 그 와중에도 두통이 생각을 방해했다. 바라던 일이었을지라도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그래서 망했다는 생각만 반복해서 떠올랐다.


타스쿠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눈을 떴다. 오전 10시가 되기 5분 전쯤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누군가에게는 이를 시간이었지만 정반대인 타스쿠로서는 아주 늦은 시간에. 당연하게도 그는 깨어나서도 츠무기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늘 먼저 일어나 츠무기를 깨우는 게 그의 몫이었는데 어쩐지 먼저 일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츠무기도 알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지난 밤중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자신처럼. 처음 204호실에 들어왔을 적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공기가 싸늘하다.


괜찮아?”


먼저 입을 연 건 역시 츠무기였다. 말을 하면서도 뭔가 전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냔 말을 들어야할 쪽은 내가 아닌가? 숙취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만큼 허리도 쿡쿡 쑤셔오는데. 하지만 고집스러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타스쿠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기 위해선 어느 의례처럼 꺼내기에 제일 무난한 말을 골랐을 뿐이다. 실은 정말 그가 괜찮은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츠무기가 궁금한 건 술에 취해 저지른 일들을 기억이나 하는지, 앞으로 둘은 그 일을 두고 어떻게 대해야 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마도 그 답을 듣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타스쿠는 괜찮으냐는 질문에조차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니까. 더 어이없는 것은 시선도 주지 않는단 거다.


타스쿠. 우리 어제.”

아무 일도 없었잖아.”
?”

아무 일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셨을 뿐이야.”


거짓말. 아무 일도 없던 것도 아니고,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억하고 싶지 않을 뿐이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면서. 그렇지 않고서는 단 1초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너 이럴 때 보면 연기 못해.”

?”
아무 일도 없던 얼굴이 아니잖아. 하다못해 없던 일로 하자는 뻔뻔한 말조차 못해?”

…….”


겨우 마주한 시선은 얼마 가지도 않고 다시 창가로 향했다. 저 눈, 등 돌리 듯 자신에게서 떠나가 버리는 눈빛이 어딘가 익숙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너 항상 그러잖아. 불리할 때면 입 꾹 다물고 아무런 말 한 마디 안 하고 네 고집만 부리고 그러면 전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굴고.”

, .”

오늘만 그런 거 아냐. 여기 처음 왔을 때도 그렇고! GOD좌 오디션 때도! 그리고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고백했을 때도.”

…….”

항상 그랬잖아. 나만 바보 만들고.”

……츠무기.”


조금 전보다는 어그러진 표정으로 나직이 츠무기의 이름을 불렀지만 되돌리기엔 늦었다.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츠무기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책상 위에 던져 둔 지갑을 겉옷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갈 거야.”

? 어딜 가. 오늘 같이 대본연습하기로 했잖아.”


문 쪽으로 향하던 츠무기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츠무기는 한숨을 푹 쉬더니 등을 돌린 채로 소리를 냅다 질렀다.


-쨩 바보!!!!”


어찌나 세게 닫았는지 연약한 목제 문이 한참이나 덜덜 떨렸다. 그리고 끝내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 ∗ ∗

 

진동이 옷깃을 타고서 지이잉 울리기 시작했다. 슬쩍 꺼낸 핸드폰의 액정 위로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하지만 츠무기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오늘은 절대로 연락을 받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묵묵부답 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는 알 필요가 있었다.


가는 길 중간에 있는 과일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요즘 딸기가 제철이니 사다드리면 좋아하실까, 하고 할머니에게 드릴 과일을 막 고르던 참이었다.


어머, 츠무기쨩 아니니?”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가족들만큼이나 익숙한 중년 여자가 서있었다. 못 본 사이에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너무 오랜만이다, . 요즘 통 놀러 오질 않고. 안 그래도 타스쿠랑 같이 연극한다고 얘기 들었어.”

하하. , 어쩌다보니 또 그렇게 됐어요.”

타스쿠는 잘 지내지? 그 녀석 집에 오지도 않고 연락도 잘 안 하니까. 아들놈이라고 둬봐야 소용없다니까.”

타쨩은 그런 데 소질 없으니까요.”

그러지 말고 지금 집에 놀러와. 마침 전골 하려고 재료 사가는 길인데 먹고 가.”

, ? 아뇨, 괜찮은.”

할머니 댁 가는 거지? 얼른 해줄 테니까 조금만 먹고 가.”


츠무기는 어쩐지 묘하게 타스쿠를 닮은 그의 어머니의 눈을 보니 어젯밤과 오늘 아침의 일들이 생각나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차마 거절하지도 못하고 타스쿠네 집까지 끌려가다시피 하고 말았다.


집은 변함이 없네요.”

아휴. 인제 와서 변할 게 뭐가 있어. 그러지 말고 끓이는데 시간 좀 걸리니까 방에 들어가서 좀 쉬고 있어.”

.”


거실을 지나치면 보이는 방문을 익숙하게 열고 들어갔다. 사람의 체온이 닿은 지 오래돼서 어쩐지 쓸쓸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집에 좀 자주 가라고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기숙사에 돌아갈 걱정보다도 앞으로 그와 다시 평범하게 지낼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었다. 아니, 아마 불가능하겠지. 질풍노도의 시기에 스치듯이 좋아하고 고백하고 아무렇지 않게 정리하고선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철없는 뻔뻔함은 사라진지 오래다. 극과 극의 기로에 서서 어느 쪽으로든 해결을 보지 않는다면 평생 그의 얼굴을 보며 어젯밤의 정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뒤끝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감각의 문제로. 부재하는 방의 주인을 생각하며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또 한 번 이렇게 그를 잃는 건가.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의 언저리에 작은 액자 두어 개가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가족사진, 하나는 츠무기와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의 뒤로 바다가 보였다. 이게 언제였더라. 정확하지 않은 기억 속의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배경을 등에 지고.


액자를 집어 들고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 뒤로 꽂혀있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발견했다. 오랜만이네. 두꺼운 양장을 힘겹게 꺼내어 펼쳐보았다. 지금보다 짧게 깎은 머리로 어색하게 포즈를 잡은 고교 시절의 타스쿠를 보니 웃음이 먼저 앞섰다. 그 뒤로 한 넉 장 정도 넘기고 나니 제 사진이 있어서 황급히 다음 장으로 넘겨버렸다.


어라.”


그 다음 장의 종이 사이에 편지 한 통이 끼워져 있었다. 봉투도 없이 서투르게 두 번 접힌 단색의 편지지였다. 언제 나 모르는 새 또 러브레터를 받은 거야, 하고 편지를 펼쳐낸 츠무기는 그 자리에서 편지 내용을 읽고 받는 이가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는 한참이나 눈을 떼지도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타스쿠, 바보.”


아마도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많이는 아니고 딱 한 방울. 그때도 그랬다. 한 고교 2년쯤. 그때는 찰나의 순간적인 감정인 줄로만 알았던 어리숙한 시절이던가.


나 너 좋아해.”

…….”

그냥 그렇다고.”

그래서 숙제는 어떻게 할 거야.”

?”


어깨를 나란히 하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은 츠무기를 향하지 않았다. 굵은 눈썹이 살짝 씰룩이는 것 정도만 보였다. 너 지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마른 침을 꿀꺽 삼켜냈지만 돌아오는 답은,


아무 것도 못 들었는데.”


라는 말뿐이었다. 정말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표정은 그게 아닌데. 나는 지금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에 집에 가서 그 상황을 다시 한 번 곱씹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그래, 우리는 친구니까. 친구. 오래된 친구. 친구가 아닌 단어로는 묶일 수 없는 사이니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차라리 잘된 거라고 자기암시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그렇게 겨우 자신을 달랬던 어린 날의 초상이, 저린 듯이 아파오는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꿈처럼. 꿈처럼.


저도 모르게 침대에 누워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때 지난 숙취가 뒤늦게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상체를 일으키고 헛구역질을 해대던 순간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좀 늦었지? 밥 다 됐어. 얼른 와서 먹어, 츠무기 쨩. 그리고는 지긋한 미소가 번졌다.


우습게도 어느 때보다도 맛있게 식사를 했다. 할머니께 드리려던 딸기 두 박스 중 한 박스는 그 집에 그대로 두고서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소식 없이 문득 찾아온 손주를 맞이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평소보다 밝았고, 자비도 언제나 그렇듯 츠무기의 품을 격하게 파고 들었다. 할 일이 없어 그새 먼지가 쌓인 방을 청소하고 좋아하던 책을 읽고 그러다 날이 저물었을 때 할머니가 차려준 저녁을 먹었다.


컴컴해진 방의 전등을 켜고 침대 위로 누웠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편지지를 집어 들었다. 지금이랑 별다른 차이가 없는 글씨체가 종이 위로 번듯하게 채워져 있다.


츠무기에게,

너한테 편지를 쓰는 건 소학교 때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네. 일단은 졸업 축하해. 그리고 대학 가서도 잘 부탁해. 어릴 때는 우리가 이렇게 기나긴 인연이 될 줄은 몰랐지. 생각해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시간보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거라고 생각해서 난 항상 조심스러웠어. 다시는 너처럼 소중한 친구를 만들지 못할 것 같았고. 그래서 너를 잃는 게 두려웠어.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야할 너와 내가 친구가 아닌 관계로 변하고 그러다가 금이 가고 시간이 지나 잊히게 될까봐. 그래서 네가 날 좋아한다 말했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그런데 그러기엔 나도 널 너무 좋아해. 정말 좋아해. 너보다도 오래 전부터일지도 몰라.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운 나지만 네 마음이 아직도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리 사이는, 변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하고 헤아렸을까. 끝내 편지의 주인에게 도달하지 못한 채 무거운 졸업 앨범의 틈에 꽂혀 빛을 보지 못했던 편지는 마치 어제 쓴 듯이 글씨가 번지지도 않고 선명했다. 우울하게 한숨을 푹 쉬자 침대 밑을 지키고 있던 자비가 고개를 내밀고 애교를 부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작은 생명체처럼 솔직하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는 타스쿠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제 앞으로 들이밀어 진 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드르륵, 드르륵그 때 문득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신경을 꺼둔 사이에도 다섯 통이나 부재중이 쌓여있던 전화를 마침내 받았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

오늘 우리 집 갔었다며 왜 말 안 했어.

그냥.”

하아, 진짜……. 할머니 집이지? 조금 이따 나와. 바로 갈게.

싫어. 오늘 안 들어갈 거야.”

알아. 그냥 드라이브라도 하자고. 다시 연락할게.


제 할 말만 하고서 툭 끊겨버린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국은 또 제멋대로 할 거면서. 하지만 또 그에게 휘둘리고 만다. 늘 그래왔다. 감정이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그가 미운 마음보다도 보고 싶은 심정이 더 큰 걸 거스를 수는 없는 거다. 반나절 만에 듣는 목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인걸.


몇 십 분이 지났을까 타스쿠에게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일찌감치 잠든 할머니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와 집 앞에 세워진 낯익은 차의 조수석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아직 추운데 그렇게 입고 왔어?”

밖에 있을 것도 아닌데 뭐.”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디 갈래, 하고 차에 시동을 걸며 묻는 말에 츠무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어딘지는 몰라도 석양이 지고 있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의 사진을 떠올리며. 타스쿠가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고 두 사람의 몸을 담은 차는 점차 속력을 내었다.


내일은 기숙사 돌아올 거지.”

…….”

너 정말 나랑 말 안 할 거야?”

…….”

됐다. 하고 싶은 말 생기면 그때 해.”


덜컹거리는 창문에 고개를 갖다 댔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때는 어떻게 해야 돼? 물음이 목구멍 끝에서 걸려 나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면 쏟아지는 바람에 필요 없는 잡생각들이 다 쓸려나갈까. 꼭 해야만 하는 말들만 남으면 조금 더 쉽게 골라낼 수 있지 않을까. 차는 계속해서 유연하게 도로를 달렸고 어두운 시야의 끝에 조용히 물결치는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


거의 다 왔어.”

여기.”

기억나? 우리 고등학교 졸업하고 며칠 뒤에 애들이랑 다 같이 왔었잖아. 해 지는 것까지 보겠다고 나대다가 둘 다 감기 걸려서 꼴사나웠는데.”


이제야 조각난 기억이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전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처음으로 어른들 한 명 없이 겨우겨우 찾아갔던 바다. 아물지 않은 추위는 바닷바람 때문에 더욱 차가워서 대충 걸쳤던 겉옷만으로는 막기 어려웠던 그때, 지는 석양을 뒤로 하고 사진을 찍고 해가 다 숨을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감기에 걸리고 말았었다. 먼저 감기에 걸린 츠무기를 보고 바보라고 놀리던 타스쿠도 하루가 더 지나 똑같이 앓아 누웠던 걸 생각하면 둘 다 바보였다. 정말 바보 같았다.


있잖아. 나 너네 집 갔다가 졸업앨범 봤어.”

?”

근데 졸업앨범에 뭐가 있더라고.”

뭐가?”

편지. 왜 나 안 줬어?”

…….”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도 케케묵은 편지라 당연히 잊었을 줄은 알았지. 그래도 설마 그 내용까지 잊었을까. 한 자 한 자 고민의 기색이 역력한 글자들을 잊었을 리는 없지. 그래서 또 항상 그렇듯 입을 다물고 있는 거겠지.


왜 안 줬어. 여태 몰랐잖아. 너는 어땠는지 평생 모를 뻔했잖아.”

…….”

그럼 지금은? 한참이나 지나버렸지만, 편지에 대한 답을 주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만, 나는 아직도 네가 좋은데. 우리는 변할 수 있는 걸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감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써도 괜찮은 사이가 될 수 있는 걸까? 끝끝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지금의 감정을 숨김없이 토해낼 수 있는 관계로 변할 수 있는 걸까? 20여 년의 세월을 무시하고서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걸까.


츠무기.”

.”

우리 어제는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해.”

…….”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전부 다 처음으로. 너랑 함께하는 처음의 경험들은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으면 좋겠으니까. 맨날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하지만 나 애인으로서는, 안 좋은 추억 주고 싶지 않아.”


처음부터 이렇게 재고 따지지 않았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너무 먼 길을 돌고 돌아서는 돌려서 말하기까지 얼마나 미련하고 멍청한지.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붙잡고 싶은 게 좋아하는 감정이라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눈감아주기로 했다. 정말 마지막으로 져주는 거야. 츠무기가 입을 비죽거렸다. 그 모습에 타스쿠가 웃어보였다. 오늘 처음으로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아니 평소에도 보기 힘들었던 얼굴이기도 하고.


좋아해?”

.”

대답이 너무 짧아.”

좋아해. 많이.”


오래 전부터 계속계속 좋아해.

, 나도.


두 사람은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처음이 아니지만 처음으로 하는 입맞춤이다. 그러기로 했다. 그래 사실은 어제의 일들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걸. 이참에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하면 된다. 오늘부터, 오늘밤부터. 오래 전의 추억이 담겨있는 이 곳에서. 시동을 꺼버린 차 안에서는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소리가, 차 밖에서는 불규칙적으로 치는 파도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두운 차창 밖으로는 달빛에 그을린 바다가 흐릿하게 넘실대고 있었다.


사실 편지는 츠무기의 바지 주머니 속에 꼭 접혀있었다. 타스쿠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 꺼내서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어버렸다. 대신 집으로 돌아가면 소중한 물건을 담아놓는 박스 안에 몰래 넣어놓기로 했다. 가족사진과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아끼는 책들, 그리고 둘이서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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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3!

어느새 또 한숨이 푹 꺼져 나왔다. 사랑을 해서 행복한 순간보다 불안하고 괴로울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제 손안에 있어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 못내 신경이 쓰인다.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일렁이는 것은 비단 좋아서만은 아닐 거다.


지금은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화가 난 것이라고, 스스로는 그렇게 우기고 있지만 그저 삐쳐있을 뿐이다. 심지어 상대는 영문도 모르는 채 일방적으로. 뭐 어때. 언제는 그러지 않았나. 언제나 일방적이지 않았나. 항상 감정표현을 하는 건 제 쪽이었는걸. 그래서 무슨 일 있느냐는 그의 메시지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난 것 같다. 최초의 연락은 아마 더욱 더 오래됐을 테지만. 아마도 이 정도면 그도 조금은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주 화가 나있는 상태라는 걸.


우리 과 후배가 셋챠가 마음에 든다는데~ 소개 안 받아볼래?”


그래, 그 얘기를 들은 건 지금으로부터 고작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일이다. 그저 평소처럼 학교 앞 평범한 식당 그 어느 곳에서 수업과 수업 사이에 짬을 내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있던 그때, 불쑥 그 말이 날아들었다. 당연히 싫다고 했다. 나 연애 같은 거 관심 없다니까, 하고.


귀여운 애인데. 나중에라도 생각 있음 말해줘~”

, .”

그래도 솔직히 그 후배 아니어도 셋챠 대시 엄청 받았을 것 같아! 그치? 과에서도 인기 엄청 많을 것 같은데!”

딱히? 일단은 관심 없어서 별로 상대 안 하니까.”

우와, 차가워. , 그러고 보니 갑자기 그거 생각났어!”

츠무츠무, 과외 학생한테 고백 받았대. 봐봐, 은근히 인기 많다니까~


…….


제 애인의 이름이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얘기의 시작과 끝 전부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일들이었다. 머릿속이 약간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뭘 했다고? 그러니까, 가르치던 여자애가 고백했다구,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는데 둘이 같이 있어서 물어봤지, 이후로 어떻게 됐으려나?


그 시점부터 입맛이 툭 떨어져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고 있던 밥도 다 버렸다. 왜 안 먹냐는 카즈나리의 말에 그저 맛이 없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저녁도 먹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런 와중에도 반리는 그 여자애 예뻤을까, 츠무기상이 좋아하는 타입일까, 나 때문에 거절한 건 아닐까, 하는 한심한 걱정들이나 하고 있었다. 완전 구질구질하게.


하지만 그보다 더 유치한 건 츠무기에게서 먼저 온 연락에는 하나도 응하지 않는 일이었다. 울리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메시지도 읽기만 하고 꺼버렸다. 그한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이렇게 많았던 적이 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보통 먼저 연락하는 쪽은 거의 자신이었고, 그의 이름이 찍힌 부재중 전화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혹은 수업 중이었을 때 기껏 한 번 온 것이 전부였으니까.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수십 통이 찍혀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네 통이다. 네 통의 전화와 열 몇 건의 메시지 끝에 마지막으로 당도한 것이 무슨 일 있느냐는 말. 걱정하는 것인지 그냥 예의상으로 묻는 말인지 반리는 알 도리가 없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부터도 줄곧 그랬지만 반리는 츠무기를 알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사람. 터무니없는 고백을 받아준 이유부터 시작해서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얼 바라는지 어떻게 해주어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토록 좋아하는데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처참하다.


그냥 생각하기를 그만하자. 그만하자. 어쩐지 열이 오르는 듯한 얼굴 위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똑똑.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안으로 돌연 나긋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마저도 주인을 닮은 듯하더니 이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반리군


여기 있었네.”

…….”

?”

…….”

안 자는 거 다 알아. 잠깐 나와 볼래?”

왜요.”
밤 산책, 하자.”


어렴풋이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지만 목소리에서부터 묻어나는 상냥함에 반리는 저도 모르게 화가 조금 누그러든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결국은 그에게 져버리고 마는 거다.


반리군 연락도 없고 밥도 안 먹었대서 걱정했어. 아픈 거 아니지?”

.”

다행이다.”


슬쩍 곁눈질로 옆을 훔쳐보니 츠무기가 팔짱을 낀 채로 얇은 팔뚝을 쓱쓱 문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날이 찬데.


아니, 근데 왜 겉옷도 안 입고 나왔어요.”

낮에도 이러고 나왔는걸.”

지금은 밤이잖아. 얼마 전까지 감기로 끙끙 앓던 사람이 또 감기 걸리려고. 자요.”

아냐, 정말 괜찮! 하하, 고마워. 반리군 상냥해.”


대충 걸치고 온 재킷을 벗어 어깨 위로 얹어주었다. 그한테는 품이 커서 어깨가 불쑥 튀어나온 꼴이 귀여웠다. 귀엽지만 그렇다고 말해주진 않을 것이다. 아직은 화가 난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벌써 져주기엔 이르니까.


발끝에 나른하게 번져오는 달빛이 치였다. 그 위로 하나둘 벚꽃잎이 날아들었다. 아직은 찬 공기가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나뭇가지를 툭 건드리면 그랬다. 어쩌면 분홍빛을 띠고 있을 꽃잎이 달빛에 물들어 새하얗다. 검정과 하얀색만으로 이루어진 세상과 거리.


그 한가운데에서 문득 어깨를 나란히 하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를 따라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 있었는지, 얘기 안 해줄 거야? 내가 뭐 잘못 했는지?”

잘못한 걸 알긴 하네. 나한테는 말 안 했어요?”

무슨 말?”

고백 받았다고. 과외학생인지 뭐인지 아무튼요.”

? 맞다, 그런 일이 있었네

하아?”


츠무기가 멋쩍게 웃어보였다. 정말로 깜박 잊고 있었어. 언젠가는 말해야지 생각만 하고. 반쯤 죽었던 화가 다시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고 했다. 어떻게 그런 걸 잊어버릴 수가 있느냐고!


근데 별거 아니었어. 그 애도 이제 대학 가서 볼 일 없고 대입 기념으로 밥 한 번 사줬다가 받은 고백이었어. 당연히 거절했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건 나한테 먼저 얘기해줘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려고 했는데 카즈군이랑 딱 마주쳐서. 하하, 변명밖에 안 되네. ……화났어?”

당연하죠. 일단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맘대로 츠무기상을 좋아한다는 게 화나고요. 것보다도 이럴 때면 난 항상 혼자 연애하고 있다는 기분 든다구요. 내가 일방적으로 츠무기상 좋아한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적어도 내가 제일 우선이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도.”

나도 좋아해.”

, ?”


나도 반리군 좋아해.


아주 찰나의 순간동안 컴컴한 거리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그때 반리는 눈앞에 있는 애인이 웃지 않고 있는 걸 발견했다.


처음엔 아니었을지라도 지금은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츠무기상.”

?”

그 말, 처음 하는 거 알아요?”


. 굳게 앙 다물고 있던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순간적으로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지금 내가 정곡 찔렀죠? 그러자 츠무기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자주 해줄게. 노력할게.”

매일.”

.”


이제야 반리는 언제나의 웃음을 되찾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화가 풀린 것은 아니다.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그를 모르는 채로, 불안을 가득 안은 채로 살아가고 사랑할 것이다. 계속 사랑을 확인 받아야만 하는 불안정한 관계인 상태로.


먼저 멈추었던 발은 또다시 먼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천천히, 천천히. 반리도 한 칸 낮은 어깨를 쫓아 걸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꽃잎이 발 아래로 낮게 깔렸다. 낮에 왔으면 더 예뻤을 것 같지. 그러면 내일 또 와요. . 츠무기상. .


키스해도 돼요?


발은 다시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한다. ,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또 웃는 얼굴이다. 한없이 상냥하고 한없이 부드러워서 누가 훔쳐갈까 매일매일 두려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얼굴.


.”


짧은 대답과 동시에 입을 맞추니 꽃내음이 피어오르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에게서 나는 향일 수도 있고 발에 밟히는 벚꽃잎이 뿜어대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계속해서 간질거리는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걸 수도 있고.


그리고 그게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아주 작은 확신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반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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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3!

눈을 감았다 뜨니 눈앞으로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시야가 붉게 익었다. 그 사이에 우뚝 서있던 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고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하나둘 헤아리듯 쳐다본다. 바람이 그를 향해 불면 마른 이파리들이 얼굴이며 어깨 언저리를 스치거나 그 위로 살포시 앉았다. 그러면 그는 작은 손으로 살살 털어내고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광경을 찍어내면 꽤 아름다운 사진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손에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기 대신에 다 식어빠진 커피가 담긴 테이크아웃 잔이 들려있었다. 얼마 남지도 않은 것을 한입에 꿀꺽 삼켜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벤치 옆의 쓰레기통으로 비어버린 잔을 던져버렸다.


츠무기 상, 이제 돌아가요. 날이 춥네.”

. 다 마셨어?”

.”


겉옷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서 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향해 뒤돌아선 그의 앞에 마주섰을 때 큰 바람이 일었다. 뒤쪽의 나무로부터 또 다시 낙엽이 흩날렸다.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움직임으로. 동시에 그를 닮아 차분한 머리카락이 같이 흐트러졌다.


.


, 반리 군. 머리에 낙엽 앉았어.”

? 어디?”

그쪽 말고. 잠깐.”


문득 다가온 얼굴과 손에 나는 아주 잠깐 일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까치발을 들고서 내민 손이 내 얼굴을 지나쳐 왼쪽 머리 위로 다다랐다. 금세 제자리로 돌아간 파리한 손가락 사이에 붉은 단풍잎 하나가 담겨있었다.


이 단풍잎 되게 예쁘다, 그치?”

.”

내가 예쁘게 말려서 나중에 선물로 줄게.”

굳이? 나중에 주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글쎄. 오늘 둘이 데이트한 기념?”

이상해.”


하하.


그러고는 작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예뻤다. 아니 그 사람이 그냥 예뻤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풍경 같은 사람. 그때 내가 두근거림을 느끼지만 않았더라면 별거 아닌 어느 하루 정도로 넘길 수 있었을 텐데. 그때 그를 좋아하게 되면 안 됐는데.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그리워할 줄 알았다면.


마주한 그의 얼굴 위로 건조한 바람과 함께 다시 한 번 낙엽비가 쏟아진다. 우수수, 우수수, 마구 쏟아지다가,


허공에서 바스라진 낙엽들 뒤로 그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눈앞에는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따가운 햇빛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도 이따금 그 사람의 꿈을 꾼다. 얼굴이 잊혀질 법도 한데 정말로 잊을만하면 나온다. 꿈의 내용은 대중없다. 엄청 행복하거나, 엄청 슬프거나, 황당하거나 혹은 민망한 것까지. 상황을 불문하고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꿈을 꾸든 나는 언제나 똑같은 허망함 속에서 눈을 뜬다.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


츠무기 상도 아직 내 생각을 할까. 아니면 완전히 잊었을까. 수년이 지난 마당에도 문득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그를 좋아했던 것만큼 그가 나를 좋아하진 않았더라도, 그의 기억 속에 내가 괜찮았던 사람으로 남길 바라는 욕심이다. 그러나 결국은 무의미할 뿐이라 굳이 답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럴 방법도 없었지만 말이다.


후회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요?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거야.


언젠가 던졌던 물음에 그는 그렇게 답했다. 그 말에 용기 내어 고백까지 했었지만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안다. 후회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걸. 게다가 상대를 좋아할수록 더더욱.


돌이켜보면 이런 비슷한 경우를 아주 어릴 적에도 겪은 적 있었다.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 뭣도 모르는 꼬맹이시절이었지만, 내가 밥을 조금이라도 더 줬다면, 놀아달라고 보챌 때 조금만 더 신경써줬더라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단지 명을 다해 죽었을 뿐인데도 나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굳이 내 잘못을 꺼내어 후회했었다.


똑같다. 나는 그를 열심히 사랑했고 되는 만큼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주었지만 남는 건 후회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내 이기적인 감정을 내뱉지도 말았어야 했고, 그를 떠날 때도 좀 더 내가 아닌 그 사람을 헤아렸어야 했는데. 시작도 끝도 전부다 이기적일 뿐이라서 난 항상 그를 생각하면 그리움과 동시에 죄책감이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그가 나를 잊어버렸을 지에 대해 집착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같은 걸 그리워하기는커녕 욕하고 헐뜯으며 살아도 할 말이 없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남이 되어버렸는걸.

 


∗ ∗ ∗



커다란 짐들은 진작 다 택배로 부쳤다. 그럼에도 나보다 늦게 도착할 터였다. 필요하고 크기가 작은 물건들만 모아서 커다란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집안에 남은 것들은 전부 버려질 것이다. 미련 없이 쓰레기봉투 속으로 죄다 집어넣었다. 그때 문득 열어놓은 창문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온 낙엽 하나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파싹 말라서 밟으면 파스스 부서져버릴 것 같은 꼴이었다.


그러고 보니 츠무기 상, 결국은 말한 대로 그때 그 단풍잎 곱게 말려 책에 끼워서 줬었는데. 어디다 뒀더라. 일본의 내 방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까. 어쨌든 기숙사에 있던 짐들은 하나도 안 버리고 전부 집으로 옮겨놨으니 없어지진 않았을 거다. 집에 가면 찾아볼까. 아직도 그대로 잘 있을까.


그 생각에 바닥에서 주운 마른 나뭇잎을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궁금증은 생각을 타고 계속해서 피어오른다. 낙엽비가 쏟아졌던 공원과 거기서 멀지 않았던 기숙사와 극장도 전부 기억 속 그대로일지. 마지막 기억도 지금과 같이 건조하기 짝이 없던 계절에서 멈춰있어서 왠지 모르게 쓸쓸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 안에서 있던 추억들은 전부 즐거웠는데. 그러고보니 츠무기 상, 아직도 극단에 있을까. 거기에서 결국 생각을 멈추고 손에 든 낙엽을 창문 밖에다 던져버렸다. 그러자 무게를 잃은 이파리는 바람을 타고서 또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 버렸다.


일본으로 돌아가면 조금은 외로울 것 같아서 꽃을 하나 키울 생각이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자니 예전의 그 비참한 상황을 또 겪고 싶지는 않아서 노선을 바꿨다. 사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람에 대한 마지막 미련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혹은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매개체이거나.


예정된 것은 오후 비행기인지라 시간이 넉넉했지만 나는 짐을 모두 싸둔 탓에 할 일이 없어 일찍 침대 위로 누웠다. 달빛이 환해서 밤이 어둡지 않았다. 타향에서의 마지막 밤이니까 오늘만큼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꼭, 감았다.




반리 군, 반리 군.


날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츠무기 상이 서있었다. 언제나처럼 웃고 있다. 나는 아예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살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가 조용히 다가와 손을 뻗더니 내 얼굴을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순간 가슴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진다.


반리 군.”

.”


어디 갔었어. 보고 싶었는데.


그러게요. 나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을까요.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는데 왜 나는 당신 옆에 있어주지 못했을까요.


눈물이 막 흐르려던 참에 그가 입을 맞춰왔다. 늘 몸은 차가웠지만 입술만큼은 따뜻했던 사람. 나를 배려하는 마음도 목소리도 지나치게 따뜻해서 안고 있으면 녹아내릴 것만 같았던 사람. 그에게 묻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 목이 메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눈을 감았다. 감고서 평생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영영 메마른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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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3!

그 애가 처음 고백했던 날엔 첫눈이 내렸다. 사실 처음엔 내리지 않았는데 그가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막 뱉어냈을 때 한 송이, 두 송이 가라앉듯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머리카락을 하얗게 덮을 만큼 쏟아졌다. 우리는 길을 걷고 있었고 그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원래도 어둑할 시간이었지만 눈 때문인지 어딘가 시야가 아득했다. 무작정 까만 밤이 아닌 회빛으로 물든 하늘.


나는 그 분위기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고백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일말의 감정도 없었으면서. 단 한 번도 그 애에게서 연애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으면서. 하지만 처음 보는 그의 천진한 웃음 때문에 본인이 이렇게 좋아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고 변명과도 같은 합리화를 했다. 그날의 눈은 아침이 되자 발등을 전부 덮을 만큼이나 많이 쌓여 있었다.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고 나서도 난 한참이나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문득 사랑고백을 해올 때도 은근슬쩍 피했고 분위기가 익으려 할 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렸다. 아마 내 생각엔 그도 눈치 챘을 것 같다. 제 사랑이 일방적으로 흐르고 있단 걸. 그래도 우리는 꾸준히 데이트를 했고 만남을 이어갔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연애는 내 예상을 깨고 꽤 오래 지속되었다.


사실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하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속삭임이 좋았으면서, 나름의 의미를 붙여 건네주는 선물들이 맘에 들었으면서.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그한테서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 때는 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독한 감기에 앓아 누웠을 적이었다. 줄줄 흐르는 식은땀을 일일이 닦아주며 줄곧 옆자리에 있던 그 애를 보다가 그냥 정말 갑자기 그랬다. 키스하고 싶다고. 내 말에 내가 놀라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감기가 다 나으면, 지금은 옮으니까. 잔뜩 오른 열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나는 선명하게 느꼈다. 그래도 그 애는 전에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옮아도 된다고. 차라리 자기한테 옮으라고. 그러고 나서 키스를 해주었다. 다정하고 상냥하게.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도록. 그 때가 처음 내 감정을 깨달음과 동시에 처음으로 그와의 입맞춤을 나눈 날이었다.


나는 그와 처음으로 함께 했던 많은 것들을 기억한다. 게임이라곤 고교 졸업 후로는 해본 적 없던 내가 생소하기 짝이 없는 기기를 들고 어설프게나마 게임을 해보았고, 처음 가보는 카페들을 이곳저곳 들렀다. 어느 봄날 처음으로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었고, 그 날에서 오래 지나지 않아 첫 섹스도 했다. 여름 끝 무렵에는 요코하마 부근의 어느 바다로 여행을 갔다. 더위는 많이 죽었을 때였고, 사람도 많지 않았던 평일 저녁의 모래사장 위에서 우리는 몰래 키스를 주고받았다. 감은 눈앞으로 석양이 지는 것이 그려졌다. 그냥 그 모든 게 영화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잔잔하고 조용한 그림과 같은 그런 영화.



 

그와 함께했던 처음의 경험과 순간들은 이렇게 또렷이 기억나는데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이상하리만큼 불투명하다. 나에게는 그 즈음의 기억이 없다. 아니,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선명하지 않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고 죽일 듯 나쁘게 헤어져서도 아니다.


갑자기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했다. 누구의 의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의 뜻인지 혹은 자신의 뜻이었을지. 그냥, 이걸 내게 말하기까지 꽤 오래 뜸 들였구나, 그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많은 얘기는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우리가 헤어져야한다는 것쯤은 이미 내정된 일이었다. 상황이 그랬다. 그래서 유학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도 우리는 헤어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종종 다투곤 했다. 나는 이미 그 애가 옆에 없으면 힘들 정도로 많이 물들어 있었구나. 나보다 7살이나 어린 그의 눈높이만큼 유치해졌구나. 그저 그런 생각들만 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 애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사고가 났다. 꽤나 큰 사고였다. 나는 속상함에 술을 잔뜩 들이 부은 상태였고 그래서 차에 치였을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 어떤 차였는지, 얼마나 컸고 얼마나 빨랐는지, 내 잘못인지 혹은 그 누군가의 잘못인지 하나도 모른다. 그냥 깨어나고 난 뒤에 경찰이 하는 말들로 아, 그렇구나, 했을 뿐이다.


정확히 일주일 하고도 사흘이 지나서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심연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겨우 눈을 떴을 때는 너무나도 새하얀 빛과 천장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만 있었던 것 같아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던 것만 빼면 사고의 규모만큼의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나는 깨어나고도 2주 가까이 가족들 외의 누구와도 만나지 못했다. 외부인 면회금지. 나는 병상에 멍하니 누워있기만 한 채 내 오랜 단짝도, 가족 같은 단원들도, 그리고 사랑하는 애인도 보지 못했다. 면회 금지가 철회되고 나서 찾아온 단원들에게서 들었다. 내가 그러고 있던 사이에 그가 떠났다고. 그 어떤 인사도 하지 못하고서. 그리고 덧붙였다. 사고가 났던 날 병원 앞에 서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엉엉. 엉엉. 나는 그 말에 다른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엄청나게 쏟아내고 말았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나뿐 아니라 다른 모두와의 연락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 누구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나도 몰랐고 알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잊지 못할 것 같아서, 핸드폰이며 노트북에 있는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지워냈다. 전부 다 지워냈는데 그 애가 언젠가 주었던 작은 선인장만큼은 어찌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도 내 방 구석 한 자리를 꾸역꾸역 차지하고 있다. 네가 식물로 태어나길 다행으로 생각해. 이따금 화분에 대고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난 생각보다 금방 멀쩡해졌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종종 그 애가 떠오를 때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울거나 맘 아파하진 않는다. 울었던 것도 병실에서 한참 쏟아낸 것이 전부다. 해는 많이 흘렀고 그간 나도 몇 명의 새로운 애인을 사귀었다가 헤어지기 반복했다. 지금도 오래되지 않은 남자친구가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고 사귀기 전에는 그저 가끔 내 연극을 보러오던 팬이었던 남자. 지독하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만 일상을 공유하기엔 꽤 많은 것이 잘 맞는 가볍게 연애하기 좋은 그런 사람. 그 사람은 커피를 좋아하고 이따금 쇼핑하기를 즐긴다. 머리도 좋고 키도 컸다. 어딘가 거친 면도 있지만 적어도 항상 나를 먼저 배려한다. 나를 지나쳐 간 다른 남자들도 그랬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사실 아직 미련이 남은 게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특히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더더욱.


아마도 나는,

영원히 셋츠 반리를 잊지 못하겠지.

 



∗ ∗ ∗

 



지이잉지이잉


으응, 끝났어?”

. 끝났는데 잠깐 동료랑 커피 한 잔 마시기로 해서. 끝날 때쯤 맞춰서 데리러 갈게.”

알았어. 조심히 와.”


날이 많이 흐렸다. 그래서인지 찾아오는 사람이 평소보다 적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나는 손님을 상대하는 대신 잎사귀마다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삭은 곳을 잘라내고 흙을 갈아주고 그러면서 시간을 때웠다.


직업은 아니고 시간이 날 때면 가끔 일을 도와주러 오곤 한다. 한참 극단의 정원을 돌볼 때 주로 들리던 곳이었다. 다른 꽃집보다도 정갈하고 가짓수도 많아서 좋아했다. 극단 기숙사의 식물들뿐 아니라 지금 방 한 구석에 있는 선인장도 이 곳 출신이다.


지금은 극단을 옮겼고 기숙사도 나왔지만 가끔 감독이나 남아있는 단원들에게서 정원관리를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고는 한다. 그렇게 가끔씩 그곳을 들르면 나처럼 극단을 나간 다른 단원들의 근황을 알음알음 들을 수도 있었다. 하나의 가십처럼 웃으며 가볍게 지나치곤 하는 이야기들.


그러고 보니 내일도 괜찮으면 나와 달라고 했던가. 가을이 다 지나서 죽어버린 잎들이 많다고 했다. 나는 가게 안을 한 바퀴 쭉 돌며 새로 심어둘 겨울 식물들을 하나둘 골라냈다. 그렇게 해도 시간은 많이 지나지 않았다. 마감까지 아직 삼십 분인가. 결국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게 밖으로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뒷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어 한 개비를 들고 불을 붙였다. 목 안쪽까지 깊게 마시다가 입 밖으로 후 내어 불면 입김과 함께 불투명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지금의 하늘과 같은 색이라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들어 올린 얼굴 한가운데로 차가운 것이 날아들었다. 하나, . 점점 개수를 늘려가더니 회빛으로 물든 하늘 전체에 눈발이 천천히 날리기 시작했다. . 아마도 올해의 첫눈. 벌써 겨울이구나.


짤랑


, 어서오세요!”


돌연 가게 문이 열리면 나는 종소리에 들고 있던 담배를 급히 껐다. 마감을 앞두고 갑자기 찾아온 손님은 안에 직원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도 않고 무심하게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뇨. 좀 볼게요.”

.”


커다란 패딩점퍼의 후드를 푹 눌러쓴 탓에 손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음침해. 얼른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커다란 등을 하릴없이 쏘아보았다. 여기에 수선화 종류는 없어요?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남자는 금방 나가기는커녕 무언가를 찾았다. 수선화라면 입구 쪽에 있어요. 서늘한 데서 잘 자라거든요. 내 말에 남자는 큰 걸음으로 입구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도 무엇이 수선화인지 분간해내지 못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앞쪽에 있는 거예요.”

꽃이 안 피었네요.”

. 겨울 끝날 때쯤에 피니까. 지금부터 잘 관리하시면 나중에 개화할 거예요.”

흐음.”

원예는 처음이세요?”

. 어깨너머로 본 게 전부라 좀 어렵네요.”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아직 피지 않은 수선화 잎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자신의 머리 위로 두터운 후드가 씌어져 있다는 걸 깨달은 듯 민망하게 손을 거두었다. 겁먹었던 것치고는 허술한 사람이네. 그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웃었다.


초심자가 키우기 좋은 다른 꽃 추천해드릴까요?”

아니요.”

…….”

그냥 이걸로 하나 주세요. 근데 여기 너무 덥네요.”

하하, 요즘 같은 날씨에 보일러 안 켜면 안쪽에 있는 꽃이 다 죽어서요.”


나는 허리를 숙여 제일 잎이 예쁘게 난 것으로 골라 흙에 박힌 뿌리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화분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카운터 앞쪽에 가시면 종류 있으니까 골라보세요. 그러나 남자는 답이 없었다. 카운터 쪽으로 옮기는 듯한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직도 고민 중인 걸까. 굽혔던 허리를 펴고 서서 남자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

…….”


많이 더웠는지 어느새 후드를 벗어낸 남자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도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대신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물을 한 방울, , 두 방울, , 흘리기 시작한다. 기억 속의 긴 머리가 전보다 짧아져 있었다. 피어싱은 더 많아졌고. 여전히 키가 컸다.


나는 그의 눈물을 보고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다만 투명한 문을 날리는 눈발이 톡톡 건드리는 미세한 소리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어쩌면 나의 시간이 멈추었던 것이 아닐까. 그에게서 고백을 받았던 첫눈의 그날로부터, 쭉 멈춰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오늘 같은 날 너를 다시 만나게 된 게 아닐까 하고.


어디 갔었어. 보고 싶었는데.”


울지 않았지만 울고 있었다. 그 어느 날 엄청나게 눈물 흘렸던 그때처럼. 아주 마음 깊이. 내 앞에 있는 아이도 아마도 그 날의 그 때처럼 서럽게 울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자기야, 나왔어그럼에도 나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영 셋츠 반리를 잊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내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어린 애처럼 우는 그 애를 마냥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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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츠무 / 계절이 바뀌는 자리下  (0) 2018.01.28
TEXT/A3!

어쩐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눈이 스르르 떠졌다. 반쯤 열어놓은 창문에서 더운 바람이 불었다. 뒤통수가 간지럽다. 비단 옅은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큰 손에 안긴 머리 위로 뜨뜻한 숨이 가닥가닥 붙는다. 정수리부터 느껴지는 더위를 느끼며 손에 닿는 등인지 모를 곳을 퍽퍽 쳤다.


더워.”


당연하지만 상대는 답이 없었다. 대신 잠든 숨만 계속 뱉어낼 뿐이다. 좀 더 힘을 주어 등과 팔뚝을 쳐댔다. 그러자 드디어 움찔거리는 반응이 왔다. 으으응, 츠무기 상하고 숨과 함께 가라앉은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품에 박힌 고개를 겨우 들어올렸다. 그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였다.


반리 군, 좀만 떨어져.”

싫어.”


뭉그러진 발음 주제에 단호히 거절의사를 밝혔다. 그러고는 오히려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은 탓에 얼굴 위로 단단한 가슴팍이 선명하게 닿았다. 츠무기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러든지 말든지 반리는 큰 인형이라도 안 듯이 다리로 몸을 감기까지 했다.


나 진짜 더워, 숨 막혀.”

그래요? 그럼.”


몸을 꿈틀거리기에 이제야 떨어지나 싶었더니 단지 밑으로 내려왔을 뿐이었다. 고개를 꺾어야만 겨우 맞닿았던 시선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아직까지도 동공이 반쯤은 풀려 있었지만.


주인의 체온보다는 외부의 계절을 더 타는 손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쓰다듬는다.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음에 대한 불만을 가득 담아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렸더니 이마 근처를 웃돌던 손이 내려와 꽈악 볼을 잡아당겼다.


아야. 뭐해.”

잠이 안 깨서요.”

근데 왜 날 꼬집어.”

귀여워서.”


혹시라도 또 꼬집을까 이제는 입술을 죽 내밀었다. 그러다 후회했다. 반리라면 볼을 잡아당겼던 것처럼 내민 입술을 두 손가락으로 꾹 잡아 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치 채지 못하게 입술을 도로 집어넣으려는데 순식간에 미적지근한 입술이 그 위를 다녀갔다. 그러고선 아까보단 비교적 더 뜨인 눈으로 둥글게 웃어 보인다.


사죄의 뽀뽀입니다.”

…….”

근데 떨어지긴 싫어요. 츠무기 상, 안고 있으면 엄청 시원하단 말이에요.”

나는 더워.”

이렇게 몸이 차가우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병원 가볼까?”

아니, 나는 덥다니까.”


흐으응. 반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선 다시 츠무기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에어컨도 있고 밖에서 바람도 불어주고 이럴 때만큼은 안고 있어도 되잖아요.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토록 한적한 주말의 오후는 생각보다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지금 이 방에 같이 있어야 할 단짝은 개인적인 일로 나가서 밤늦게나 들어온다 했고 다른 단원들도 대부분 더 시원한 곳을 찾겠다며 기숙사 밖을 나가버렸다. 그래봤자 고작 근처 카페나 갔겠지마는.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서 제 할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두 사람을 찾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았다. 높이 치솟은 더위 외에는 그 아무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에어컨 어쩐지 하나도 안 시원한 것 같은데.


눈앞으로 보이는 단단한 어깨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했더니만 역시나 반리는 금세 또 잠들어있었다. 더운 숨을 쌕쌕 내뱉으면서. 얄미운 마음도 잠시, 조금 전의 저처럼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를 가지런히 넘겨주었다. 그럼 나도 모처럼의 여유를 좀 즐겨볼까하고 눈을 꼭 감았다. 등 뒤로 팔도 감았다. 그러고는 반리가 그랬듯 꼭 껴안았다. 이러고 있으면 더워서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투덜거렸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금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잠든 새에도 창가에서 조금씩 불던 바람이 뒤통수를 살랑살랑 간지럽히고는 했다.

 

∗ ∗ ∗

 

츠무기.”

?”
오늘 뭐 했어?”

그냥 계속 잤는데.”

……방에서?”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다그치는 듯한 타스쿠의 말투에 고개를 뻣뻣하게 끄덕였다. 설마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했다고 게으르다며 혼내려는 걸까. 괜히 풀이 죽어서 말없이 젖은 머리를 탈탈 털어냈다.


씻고 있던 사이에 돌아온 타스쿠는 츠무기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올 적부터 내내 심각한 얼굴이었다. 뭐라도 잃어버렸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는 갑자기 방을 나서더니 낯익은 연장통을 들고 나타났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너 대체 방에 어떻게 있었냐. 에어컨 완전 고장 난 것 같은데.”

……?”


맙소사. 어쩐지 에어컨 근처를 계속 서성이던 타스쿠 옆으로 다가가보니 에어컨은 전원만 켜져 있을 뿐 한 톨의 바람도 뱉어내지 않고 있었다. 그냥 덥다고만 생각했지 에어컨이 고장 났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질 못했는데. 오늘 하루가 유난히 조용했던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덜덜거리는 기계가 움직이질 않으니 당연하지.


네가 이 정도로 둔한 줄은 몰랐는데.


에어컨을 고칠 요량으로 연장통을 뒤적거리는 타스쿠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뱉었다. 한숨을 쉬고 싶은 쪽은 본인이었지만 투덜거리는 것보다도 이제는 앞으로의 걱정을 해야만 했다. 만약 이 늦은 시간에 타스쿠도 맛이 가버린 기계를 어찌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낮보다는 서늘한 밤이래도 이 방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반리에게로 가서 들러붙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수 같지도 않을 복수라고 봐도 좋았다. 그래봤자 손해 볼 사람은 반리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건 전혀 모르는 듯, 츠무기는 핸드폰을 켜고선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메시지를 막 적어내고 있었다. 실은 내심 에어컨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문득 떠올랐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TEXT/A3!

투명할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청춘 드라마를 찍기엔 아주 완벽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촬영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아침 댓바람부터 계속된 촬영은 무엇이 문제고 불만인지 모른 채 좀처럼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감독의 불만족스러운 컷 사인 뒤로 텐마는 몰래 한숨을 푹 쉬며 이가와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평소대로라면 학교를 마칠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른 건 어제부터 내내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는 것.


그런 제 사정을 미리 말해놓았다지만 못내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LIME 대화목록에서 확인하지 않은 숱한 이름들 사이에서 익숙한 넉 자를 찾아냈다. 이름의 주인은 말주변이 없을뿐더러 이런 메신저 같은 것에도 취약한 타입이다. 단답형으로 끝나버린 지난 대화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무슨 말을 보내봐야 의미 없어 보였다. 차라리 밤에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 말 몇 마디 더 주고받는 편이 훨씬 나을 게 뻔하다. 그래서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화면을 툭 꺼버렸다.


스메라기, 우에하라, 잠시만 이쪽으로.”

, 감독.”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


텐마는 감독과의 짧은 미팅 후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어쩐지 감독의 표정이 아까부터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건만. 갑자기 예정에도 대본에도 없던 키스신을 넣는다니! 자네들이 아직 학생이라 웬만하면 안 넣으려고 했는데 자꾸 욕심이 나서 말이야라고 말하면 다냐! 텐마는 욕하고 싶은 심정을 목구멍 안쪽으로 침착하게 욱여넣었다.


미리 말해야겠지. 그게 좋겠지. 아무리 이게 직업이라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TV에서 생판 남과 키스하고 있는 애인을 봐버린다면 그 누구라도 황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배신감이 드는 건 그다음 문제고.


하지만 도무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이 정도의 얄팍한 이해심조차 없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라지만 어떻게 얘기를 해놓아야 그가 당황하지 않을지, 기분 나빠하지 않을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 상황에 깊은 한숨만 반복해서 꺼져 내렸다.


쥬자 상 나 오늘 키스신 찍어.


아니야, 너무 통보식이잖아.


쥬자 상 내가 의도한 건 아닌데 갑자기 키스신 찍게 됐어 괜찮지?


좀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쥬자 상 만약 내가 키스신 같은 거 찍으면 어떨 것 같아?


이건 말해주는 게 아니라 떠보는 거잖아!


기껏 세팅해놓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천하의 스메라기 텐마가 짧은 메시지 하나를 못 보내서 이렇게 쩔쩔매다니. 사실 뭐라고 말을 하든 그는 그러려니 할 게 분명한데. 아니,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을 수도 있다. 지나치게 단순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게 효도 쥬자였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 진짜 모르겠다.”


머리를 쥐어짜며 몇 번이나 썼다 지웠던 문장을 다시 한번 적어내기 시작할 때였다.


촬영 다시 시작하지!”


겨우 정리한 말들을 다 쓰지도 못했는데 쓸데없이 고민하는 것만으로 쉬는 시간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핸드폰을 급하게 끄고 이가와에서 넘겨주었다. 촬영장 안쪽으로 돌아가니 감독은 텐마와 상대 여배우를 향해 제 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 전에 말이야. 스태프들이랑도 상의해봤는데 역시 키스신은 없는 게 낫겠지? 와하하! 둘 그림이 좋아서 괜히 욕심 좀 내봤는데 그냥 없던 얘기로 하지!”

하아아?”


맙소사. 변덕스럽기로 자자한 사람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을 줄은 몰랐다. 내 날려버린 시간은? 정신적 고통은!? 어이없는 탄식이 막 흘러나왔지만 제 부모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런 걸 따질 용기가 사라져서 텐마는 힘없이 알겠다는 대답만 남겼다. 그래도 메시지 안 보내서 다행이다. 그것만 다행이었다. 답답하게 속을 눌러대던 짜증은 더 커져서 얼른 전부 끝내고 조금이라도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맘만 더 부풀었다.

 

∗ ∗ ∗

 

아아, 지쳤다.”

내일은 스케줄 없으니까 푹 쉬시고 등교시간 맞춰서 마중 올게요.”

, 수고했어. 그만 가봐.”


일찍 끝나기는커녕 저녁 시간마저 한참이나 지나버렸다. 남은 음식이나 있으려나. 먹성 좋은 남자 놈들뿐인지라 아무리 식사당번들의 손이 크더라도 남는 적이 거의 없으니 별 기대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안 먹어도 억울하지 않게 오늘 메뉴가 카레였더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매니저를 돌려보낸 후 고픈 배를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며 터덜터덜 계단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


텐마.”

? 쥬자 상?”


불빛이 거의 없는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제 이름을 부르는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챘다.


여기서 뭐하는.”

이쪽.”

으응?”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억센 손에 잡혀선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다. 한 마디 설명도 없이 그가 데려간 곳은 건물 옆 후미진 공간이었다. 이 시간엔 현관 앞쪽보다도 더 빛이 들지 않아 단원들의 눈을 피해 종종 발을 들이곤 했던 장소였지만 지금 이 느닷없는 상황 전개에 과거 회상 따위를 할 여유는 없었다갑자기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내내 침묵하던 그가 돌연 입을 맞춰왔다. 당황한 손이 허공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그러건 말건 쥬자의 양손은 능숙하게 턱을 감싸 쥐었다. 방황하던 손이 겨우 굵은 팔뚝 위로 자리 잡았을 때 입술이 떨어졌다. 텐마는 아마도 발끝까지 시뻘게졌을 거라고 속으로 단언했다. 지금이 밤중이라 다행이었다.


, 갑자기 뭔데!”

키스하고 싶댔잖아.”

하아? 내가 언제!?”

아까 LIME으로.”

내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과는 반대로 하얗게 질린 머릿속에선 한낮의 기억이 뭉텅 사라져 버려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물음표만 잔뜩 그리는 텐마의 얼굴을 슥 보더니 쥬자는 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금방 눈앞으로 액정을 들이밀었다. 그 위로 떠오른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텐마는 허탈하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쥬자 상 나 키스


대화창의 맨 아래에는 쓰다가 끊겨버린 문장이 그대로 전송되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아마도 쥬자 상 나 키스신 찍게 됐어 미안. 대신 돌아가는 길에 케이크 사 갈 테니까.이런 식으로 쓰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다가 촬영이 재개하는 바람에 급하게 핸드폰을 껐고, 그 도중에 전송 버튼을 잘못 누른 듯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멀지 않은 과거의 일들로 인해 텐마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이건그 사정이. 그런 의미로 보낸 거 아니야. 것보다 그렇다고 밖에서 여태 나 올 때까지 기다린 거냐고.”

. 그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 건가.”


어느덧 시야는 어둠에 익숙해졌고 눈앞의 실망한 듯한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표정 변화는 크지 않은 주제에 눈빛은 참 읽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텐마는 멍청하게도 그 눈빛에 참 약했다.


잘못 보낸 거니까. 근데 뭐, 하고 싶은 거 같기도 하고.”

…….”

방금은 너무 짧았으니까.”


그 찰나의 순간 달이 구름에 가렸는지 희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필 이런 중요한 때에! 그러나 아쉬움은 금방 잊고 이내 눈을 폭 감았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뜨뜻한 날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호흡을 섞었다.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목 뒤로 팔을 감는다. 어딘가 단내가 풍겨오는 것은 이미 익숙해진 일이다. ,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케이크 사 온다는 것도 깜박했네. 어차피 문제의 키스신은 없는 일이 돼버렸지만. 대신 내일 학교 끝나고 그를 데리고 역 근처 새로 생긴 타르트 집이라도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겉옷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 두어 번 정도. 아마도 왜 이렇게 늦느냐며 먼저 불 끄고 자겠다는 룸메이트의 재촉 메시지겠지. 그러건 말건 텐마는 울리는 진동을 무시하고서 감싸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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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3!

, 셋츠. 오락실 가자.”

귀찮아.”

같이 가자. 수가 안 맞는단 말이야. 마츠다가 쏜대.”

뭔 지랄이야. 암튼 셋츠 너도 갈 거지?”


어차피 든 것 없는 가방을 정리하던 중, 반 친구들이 몰려와 동행을 요구했다. 친구라는 이름은 사실 그들과의 관계를 포장하기 위한 그럴싸한 도구일 뿐이었고 반리는 그들을 그저 힘세 보이는 친구를 갈구하는 졸개 정도로 여겼다. 물론 속으로만.


지이잉, 지이잉.


귀찮아진 참에 책상 위에 덮어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의욕 없는 손으로 뒤집은 액정 위로 밤새 곱씹었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 동공이 커진 줄도 모른 채 잽싸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반리 군, 학교 끝났어?”

. 지금 막이요.”

나 오늘 수업이 취소 됐네. 벌써 밖에 나왔는데. 괜찮으면 어제 말한 카페 오늘 갈래?”

지금요?”

. 역시 안 될까나? 미안, 맘대로 바꿔서.”

아니요! 지금 가요!”


순간적으로 소리친 탓에 주변에 몰려있던 녀석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통화를 끝내고는 어쩌냐, 선약이 있어서라는 변명을 던지고는 제 이름을 불러대는 무리 사이를 빠져나왔다.


반리는 약속한 카페 근처까지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면 도착지다. 골목의 끝에 멈춰서고는 가장자리에 우뚝 서있는 도로반사경으로 제 꼴을 바라보았다. 급히 걷느라고 흐트러진 머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내가 왜? 라는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 코너를 돌면 츠무기가 서있다. 그의 앞에서 급하게 온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말하자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언제나 여유 있어야할 셋츠 반리가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그 여유를 잃어버린다니 그런 모습은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거다. 그래서 그런 거라고 반리는 또 한 번 자신을 합리화했다. 온통 모순투성이인 자기합리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불량한 학생을 츠무기는 언제나 그렇듯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계산의 몫은 결국 츠무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무리 반리 군이 돈이 많더라도 어른의 자존심은 지켜주길 바라. 계산대 앞에서 던져진 그의 단언이었다.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반리의 명백한 패배였다.


츠무기 상한테 지는 건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 효도놈한테 지면 얼마나 빡치는데요.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말지.”

그런 말 하면 못써. 예쁜 말.”


예쁜 말 대신 반리는 입술 앞으로 들이밀어 진 빵조각을 넙죽 받아먹었다. 어린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부모처럼 츠무기는 흐뭇하게 웃었다.


맛있다. 오늘 세상에서 제일 단 초코빵 먹었다고 효도놈한테 자랑해야지.”

둘이 사이좋네.”

우웩. 절대 아닌데요. 츠무기 상이랑 타스쿠 상에 비하면아니 비할 것도 못 되지. 아무튼 사이좋아질 예정도 없습니다요.”

에이, 나랑 타스쿠는 이 정도로 오래 알고 지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은데. 우리도 자주 싸우는걸.”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서로 고민이나 비밀 얘기도 많이 하고 그럴 거 아니에요.”

꼭 그렇진 않아. 가끔 고민걱정 털어놓다가 나약한 소리한다고 혼날 때도 많으니까. 물론 타스쿠가 위로 같은 게 좀 서툴러서 그렇긴 하지만. 그래서 잘 안 해.”

그럼 그때 울었던 것도 얘기 안 했어요?”

, ?”


커피잔을 든 츠무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일순 당황한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양이 선명하게 보였다.


, 죄송. 못 들은 걸로 해요.”

아니야. 난 네가 왜 말 안 꺼내나 했어. , 그날 사실 기억이 중간중간 끊겨서. 울었던 건 생각나는데 나 왜 울었을까.”

외롭다고 했어요.”

…….”


착각이 아니었다. 츠무기는 전에 보였던 처연한 눈이 다시금 흐트러졌다.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던 것이 반리의 말 한 마디에 불쑥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괜한 소리를 했네. 미안해.”

됐어요. 그래서 뭐가 그렇게 외로운 건데요.”

그냥 환절기라 그런가 봐. 가끔 감기 걸리듯이 감정적으로 우울해질 때가 있거든.”

연애 같은 게 하고 싶은 거예요?”


또 한 번 손이 잠깐 멈추었다가 아까보다는 좀 더 금방 제자리로 돌아갔다. 반리는 이럴 때면 직설적인 제 성격을 탓하게 된다. 이제는 난감하다기보다 복잡하다는 게 더 알맞을 듯한 표정을 읽어버린 바람에 더 그랬다. 그런데도 이다지도 착한 츠무기는 제 얘기를 조곤조곤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걸 잘 모르겠어. 인생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 적도 별로 없지만 문득 연애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전부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관계 있잖아. 가끔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어. 그런데 내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연애를 한다면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애초에 내가 외롭다고 느끼는 감정들이 그 때문만은 아니니까. 그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찾아온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숨이 턱 막힌 듯 말을 멈추었다. 그 사이 식었는지 옅은 김을 뿌리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냥 그런 거야. 굳어 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어쨌든 연애하고 싶다는 말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거야?”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츠무기 상 맘인데. 심리학도라면서 자기 맘도 잘 모르네.”

원래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알기 어려운 법이거든.”


저는 당신을 제일 모르겠는데요. 반리는 식은 커피를 들이마시며 하려던 말까지 전부 삼켜냈다. 그 바람에 한입에 꿀꺽 잔을 비우고 말았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미 달력이 한 장 넘어가 버린 요즘은 제법 일몰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는 했다. 오묘한 색을 띠는 하늘 위로 어설픈 원을 그리고 있는 달이 떠있었다. 아직 해가 다 지지도 않았는데.


반리 군이랑 있으면 뭔가 맘이 편한 것 같아.”

그래요? 그거 참 영광이네요.”

하하, 얼른 가자. 저녁 시간 놓치겠다.”


츠무기의 검푸른 머리 위로 노을이 쏟아졌다. 한 올 한 올 반사되는 주홍빛을 바라보자니 어쩌면 아까 츠무기가 했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곳곳에서 쏟아지기 시작해 점차 굵어지고 내일 새벽까지 밤새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오전 6시에는 그칠 전망이지만 비와 함께 기온이 내려가 오늘 날씨보다 쌀쌀할 것으로 예상되오니 외투를 잘 챙기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버스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온다. 반리는 온전한 제 음악 감상 시간이 빗소리나 여타 소음들에 묻히는 것이 싫어 진즉에 이어폰을 빼버린 상태였다. 허공을 긋는 빗줄기 사이로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수증기에 부딪히는 소리들이 울려 소란스럽다. 그럼에도 어딘가 적적한 것은 가을비가 내리는 날의 통상적인 기분이었다.


지이잉-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누나였다. 지금 막 그녀의 부름 때문에 집에 다녀오는 길이니 당연히 안부인사 혹은 감사인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가는 중이야? 노트북 또 안 되는데. 제대로 고친 거 맞아?”

?”

괜찮으면 다시 좀 와줄래? 나 일 때문에 급해.”

내가 무슨 엔지니어야? 그냥 AS 부르라니까. 바빠, 끊어.”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누나에게 큰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날씨의 영향으로 인한 우울감이 짜증으로 번졌다. 그런 와중에도 맘속으로 어딘가 미안함이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참 역설적인 감정변화였다. 다음에 집 갈 때 디저트나 사가지 뭐. 언제나 결론은 가볍게 끝맺게 된다.


반리는 비로도웨이 근처의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집에서 아무 우산이나 집어온 바람에 평소에 들고 다니는 잘빠진 색상이 아닌 거무죽죽하고 둔할 정도로 큰 우산을 펼쳐 들었다. 기숙사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안 저처럼 우산을 놓고 나왔으나 미처 임시방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겉옷이나 가방을 방패 삼아 급히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하나같이 일기예보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무심한 삶 속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반리는 유독 군중들과 동떨어진 모양의 사람을 발견했다. 비 내리는 날엔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공원 끝자락의 나무 아래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우뚝 서있는 남자를.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가 누구인지는 언젠가도 본 적 있는 눈을 통해 확신했다.


여기서 뭐 해요.”

…….”

울어요?”

…….”

이거 잠깐 들어봐요.”


들고 있던 우산을 츠무기의 손으로 건네주었다. 날씨도 추운데 셔츠 한 장 달랑 입고 미련하게 비는 다 맞고 있고 뭐 하는 거예요, 진짜. 반리는 재킷을 벗어 축축한 어깨 위로 덮어주고는 우산을 다시 뺏어 들었다.


괜찮아, 이런 거 안 빌려줘도. 나 이미 다 젖었는걸.”

감기 걸리면 걱정하는 사람들 한둘 아니에요.”

…….”

가요.”

아니야, 먼저 가. 난 이따가 갈게.”

? 진짜 감기 걸리려고 작정했어요?”

있지, 반리 군.”


어딘가 지금의 이 날씨와 어울리는 눈이 다시 빗방울 가득한 허공을 향했다. 본 적 있다고는 하지만 그때와는 짐짓 다른 분위기였다. 공기가 바닥으로 내려앉은 듯한 극한의 중력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약간의 침묵 끝에 츠무기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우울해졌을 때, 그 공허함을 기억해놓으면 언젠가의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거야. 걱정하는 건 알아. 하지만 내 감정이고 인생이고 어차피 맘대로 떨쳐낼 수 없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맞닥뜨리는 수밖에 없어. 나는그래. 그니까 너무 그러지 마.”


절로 한숨과도 같은 탄식이 튀어나온다. 화인지 짜증인지 혹은 동정인지 뭔지 모를 감정들이 무심코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억눌러야 했다. 이제는 고민하기엔 너무나 명확해져 버린 더 큰 감정이 존재하기에.


정말요, 당신은, 당신은,


진짜 바보예요? 언제까지나 혼자만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요. 이미 나한테 털어놓았던 것만으로도 나는 당신한테 어느 정도 관여할 권리가 생긴 거예요. 물론 나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데 나답지 않게 신경을 썼던 그 시점부터 나는.”


츠무기 상을 좋아하게 돼버린 거라구요.


“그러니까, 나한테라도 기대란 말이에요.


빗줄기가 굵어졌다.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는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큰 우산 아래에 있어도 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빗물이 다 쳐들어와 머리카락이며 웃이 젖어들었다. 엉망진창이었다. 아직도 츠무기가 우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웃는 건지도, 알아 듣기나 했을는지도, 무엇 하나도.


돌아가면 목욕부터 하는 거예요.”

…….”

알았죠?”

.”


다행히도 손목을 잡고 끌어내자 그는 순순히 발을 뗐다. 돌아가는 동안의 적막을 먼저 깬 것은 츠무기였다. 반리 군, 화난 거 아니지? 안 났는데요. 화나 보여. 누나 심부름 다녀오는 길이라 좀 짜증 난 상태긴 해요. 화 풀어. 화 안 났다니까? 그러자 그는 예의 항상 그리는 웃음을 지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얼굴을.


돌아가던 시선의 끝에 항상 걸쳐있던 그 존재가 무슨 의미였는지 막 깨달은 이때 반리는 그가 좋아진 이유를 하나둘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가령 지금처럼 다투다가도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화하는 부분이라든지, 언제나 자기보다 남을 생각하는 지나친 배려심이라든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도달하는 건 아무래도 그거였다. 부드럽게 지어 보이는 한없이 예쁜 미소.


반리는 제 이기적인 세계에 누군가의 침범을 처음으로 허락하는 참이었다.

 

∗∗∗

 

, 창문 닫아. 비도 오는데 추워죽겠네.”

추우면 네가 닫아.”

? 게임 하는 거 안 보이냐?”

…….”


저게 씹네. 투덜거리면서도 게임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FEVER모드일 때 제일 집중해야 한다고. 판 끝나면 효도 자식 결판 내줘야지. 이따위 생각들을 하며 액정을 마구 때리는 도중에 갑자기 화면 한가운데로 LIME 알림창이 떴다.


…….”


메시지 3개가 연달아 떴다가 금방 사라졌음에도 반리는 멍하니 손을 뗀 채였다. 기분 나쁜 효과음과 함께 죽어버렸다. 얼마 안 가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좀 전과는 다른 발신자였다.


야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너 때문에 졌잖아

미안미안 나 피곤해서 그냥 끌게여 담판은 이기십쇼


이타루에게는 대충 에둘러 핑계를 댔다. 아무래도 츠무기한테 메시지가 온 시점부터는 게임을 더 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게 됐다. 것도 미리보기 창으로 떴다가 사라진 글자들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반리 군 오늘 고마웠어.

생각해봤는데.....아직은 잘 모르겠지만....나 아까 조금은 설렜던 거 같아

음 너무 신경 쓰진 마. 잘 자~


대화창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들여다봤다. 이건 청신호인 걸까.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 잇새를 타고 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혼자서 비실비실 웃어대는 모습에 쥬자가 미친 놈이라며 진저리를 치더니 창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런 재수 없는 룸메이트는 안중에도 없는 반리는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할지 이 말 저 말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메시지 하나만 보내고서 핸드폰을 탁 꺼버렸다. 어쩐지 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설마 감기인가. 아니, 꼴에 어울리지 않는 답장을 보내서 알아서 소름 돋은 걸지도 모른다. 다른 말 하나 없이 「♥」 하나만 덜렁 보내버렸으니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창피하니 얼른 자버리자. 목덜미가 뜨거워진 것을 느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속으로 잔상처럼 남은 츠무기의 얼굴을 그리며 눈을 꾹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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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3!

아래층에서부터 창문을 타고서 회색빛의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겹쳐 들려온다. 제아무리 조용하다 싶을 정도의 멤버들이 대다수인 모임이더라도 머릿수가 많고 술이 들어가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같은 방에 있어야할 사람은 일찌감치 나간 지 오래였다. 명목은 혼자 남아 쓸쓸해하고 있을 타이치가 놀아달라며 불렀다는 이유. 실상은 그저 반리와 한 공간에 있기 싫었던 거라 좀처럼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밤새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참 별거 없는 합숙 마지막 밤이었다.


더웠던 여름은 그새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름조의 새 공연이 막을 내리고 여름의 마지막 달력이 넘어가기 직전, 가을조와 겨울조의 공동합숙이 또 한 번 이루어졌다. 숙소는 온천이 없다는 점만 빼면 전보다 훨씬 좋았다. 물론 그만큼 합숙 강도도 올랐지만 짠돌이 사쿄 상이 힘 좀 썼네.”하고 던진 농담 하나에 등짝을 거세게 얻어맞았던 거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샤워를 마친 반리는 곧장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 게임을 했다. 밤에 같이 파티를 맺자던 이타루는 소식이 툭 끊겼다. 아마 약속을 잊은 채 다른 인터넷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무의미하게 터치만 반복하다 보니 절로 하품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액정 위로 GAME OVER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 혀를 짧게 차고는 하던 게임을 끄고 또 다른 게임을 켰다. 출석 보상만 다 받고 잠이나 자자고 생각한 참이었다.


덜컥.


별안간 문고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효도가 벌써 왔나, 귀찮게. 당연하게도 거기서 생각이 멈춘 탓에 반리는 액정만 두들기며 바깥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덜컥이는 소리만 계속 날 뿐 끝내 열리지는 않는 것이다. 이윽고 거칠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매우 불규칙적인 템포로. 참아왔던 짜증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 잠갔으니까 알아서 들어와, 멍청아!”

문이안 열려.”


어라, 효도 목소리가 아닌데. 굵직해야 할 목소리 대신 넘어오는 미성에 반리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이 심야의 불청객이 누구인지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내 붙들고 있던 핸드폰을 드디어 내려놓고선 곧장 발을 옮겨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앞에는 제 몸 하나 가누기 어려워 보이는 츠무기가 서 있었다.


츠무기 상, 무슨 일?”

, 잘 거야. 근데 반리군 왜 내 방에 있지?”

제 방인데요.”

으응. 그럼 나 잘게.”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리가. 그는 반리의 말은 조금도 듣지 않고선 신발을 휙 벗어 던지더니 휘적대는 몸으로 방 한가운데까지 걸어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츠무기의 모습에 꽤 당황하고 말았다. 대체 뭘 얼마나 마셨기에 이 지경이 됐으며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냔 말이다. 심지어 츠무기의 방은 완전 반대편 끝이다. 아아, 너무 취한 나머지 방향을 착각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차라리 누군가라도 있는 방으로 온 게 다행일지도.


계속 비틀대던 몸이 일순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던 걸 가까스로 붙잡았다. 제 한품에 겨우 들어오는 마른 몸을 침대 위로 옮겨 눕혀주었다. 그러자 츠무기는 앓는 소리를 내며 구석에 붙더니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숨소리. 벌써 잠들어버린 거야? 순식간에 눈앞에서 잠자리를 빼앗긴 반리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츠무기가 말랐다고 한들 이 작은 침대에서 남자 둘이 눕는 건 꽤 버거울 터였다. 그렇다고 효도의 침대에서 잤다가 걸리면돌아오지도 않을 것 같지만발로 걷어차일 게 뻔했다.


반대편 침대 위에 걸터앉아 고민하다가 이내 다시 일어서서는 츠무기에게로 다가갔다. 일단 다리 밑에 깔려 있던 이불을 빼내어 웅크린 몸 위로 덮어주고는 움츠린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불 끌게요. 저는 츠무기 상 방 가서 잘 테니까 푹 자요.”

…….”


잠에 빠져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그런데 더 방해되지 않도록 어깨에 짚은 손을 떼어내던 순간,


가지마.”

?”


늦여름의 체온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하게 차가운 살갗이 갑작스레 손목에 닿았다. 깊이 잠든 줄로만 알았던 츠무기가 붙잡은 손목을 지지대 삼아 허리를 일으켰다. 이렇게 힘이 셌나 싶을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더니 초점이 엇나간 시선이 반리를 향했다.


그런 와중에 그런 얼굴을 하는 건 반칙이었다. 마치 근래의 반리가 자신에게 무척이나 물러졌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잔뜩 쏟아내기 직전의 얼굴, 그리고 눈.


가지 말고 옆에 있어.”

? 아니, 그 침대도 좁고요. 자는데 불편할.”

나 너무 외로워. 옆에, 옆에 있어 줘 그냥.”


축축이 젖은 목소리가 끝내 울음으로 번졌다. 반리 군, 미안해. 근데눈앞의 사람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이불 위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 있느냐는 질문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그저 손목을 붙잡고 있는 손 위로 남은 한 손을 겹쳐 올렸다.


안 갈게요. 안 갈 테니까 그만 울어요, ?”

…….”

진짜요. 약속.”


여전히 숙인 얼굴 앞으로 새끼손가락을 들이밀었다. 훌쩍이는 소리가 점차 멎었다. 금세 부은 얼굴을 들고 눈을 다시 마주했다. 그럼에도 가만히 놓인 손을 억지로 들어 올려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감정기복이 순식간이라더니 츠무기는 그새 옅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일단 누워요. 불 끄고 올 테니까.”

…….”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진짜 안 간다니까?”

.”


츠무기를 다시금 제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그래봤자 몇 걸음 되지 않는 현관 앞으로 가 스위치를 끄고 돌아오는 그 짧은 사이에 그는 벌써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나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더니. 조금은 억울해진 반리는 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츠무기의 옆으로 나란히 누웠다.


곧게 눈을 닫은 얼굴을 마주했다. 단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도움이 될까요. 질문은 목구멍 언저리에 머무른 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뱉더라도 듣지 못할 상대는 그저 옅은 숨만 쉴 뿐이다. 아까보다 훨씬 안정감 있게. 조금은 편해진 걸까. 그는 이따금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문득 꿈틀거리던 손이 언저리에 놓여있던 반리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도 역시 아까보다는 따듯했다. 하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담긴 얼굴은 짙은 적막을 띠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오로지 반리만 알고 있게 돼버린 비밀을. 손안에 담긴 온기를 더욱 꼭 붙잡고선 규칙적인 숨소리에 파고들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도 밖에서 흘러오는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점차 먹먹해져 갔다.


…….”

어이, 일어나.”

으음.”

.”


몸이 흔들리는 감각에 눈을 떴다. 왜인지 품 안에는 츠무기가 자고 있었다. 공간이 좁아서 잠결에 끌어안았나. 상황 판단이 제대로 서지도 않고 있는데 또 한 번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등 한가운데로 거친 타격감이 날아들었다.


아야! 뭐하는 거야, 새꺄!”

깼으면 가만있지 말고 나갈 준비해라, 셋츠. 집합시간 늦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간다고 사쿄 상이 그랬으니까.”

?”

너 하나쯤은 그냥 버리고 갔을 텐데 츠무기 상이 있으니 봐주는 거다. 애초에 왜 껴안고 자고 있는 건데.”

알 게 뭐야.”

아무튼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츠무기 상도 얼른 깨우고 나와.”

, .”


역시나 쥬자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던 듯하다. 그냥 침대 뺏어 쓸 걸. 이미 제 짐은 다 챙겨놓은 상태였는지 쥬자는 가방을 메고 곧장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치사한 새끼. 재수 없는 놈. 이미 닫힌 문에 대고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아직도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츠무기의 어깨를 흔들었다.


츠무기 상, 아침이에요. 늦었어요.”

…….”

늦으면 버리고 간대요. 얼른 일어나요.”


격하게 흔들어대는데도 그는 계속 잠꼬대와 다를 바 없는 앓는 소리만 반복했다.


우응.”

츠무기 상, 빨리 일으악!”

으아미안, 반리 군.”


꼼짝도 하지 않던 츠무기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몸을 휙 일으키는 바람에 그의 어깨에 머리통을 부딪치고 말았다. 멀쩡하지 않은 건 츠무기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다만 그는 충돌이 있던 어깨가 아닌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아으머리 아파.”

아야야. 괜찮아요?”

머리 깨질 것 같아. , 정말. 미안해, 반리 군. 밤새 귀찮게 했지 내가.”

기억이나 나요?”

, 조금.”


그다지 미덥지 않은 표정이지만 반리는 믿기로 했다. 만일 진짜로 전부 다 기억하고 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반리는 그의 비밀을 알게 돼버린 채로, 츠무기는 술김에 눈물을 흘렸다는 것으로, 그날 밤이 기억될 테니까. 츠무기는 침대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무엇하나 들고 오지 않았듯 여전히 텅 빈 손으로 마른세수만 연거푸 하며 문으로 향했다.


으으, 어제 갑자기 사라져서 타스쿠한테 제대로 혼나겠다. 나는 내 방 가서 준비하고 나올게. 이따 봐.”


그럼에도 한결같이 선한 얼굴로 그는 인사를 했다. 반리는 맘이 약간 무거워짐을 느꼈다. 아마도 츠무기는 이후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착하게만 살겠지. 술에 의지하지 않으면 토해내기 어려운 감정을 그대로 머금고서. 때때로는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이기적으로 굴어도 될 법한데. 대답 대신에 목만 살짝 끄덕였다. 츠무기의 어젯밤 행동이 반리에게 얼마나 큰 짐을 준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반증이었다. 그는 어차피 모르겠지만.


아차, 반리 군!”

?”

고마워.”


-


문은 닫혔고 아직 가지 않은 여름의 아침은 후덥지근했지만 츠무기가 다녀간 자리 위로 옅은 냉기가 감돌았다. 비슷하게 차가웠던 손, 그렇지만 이내 올라오던 미열의 감각. 그 간극에서 반리는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

 

사실 반리가 츠무기의 이상기후를 눈치 챈 것은 합숙보다도 이전의 일이었다. 그것은 한없이 평범할 뿐인 순간에서 시작한다. 문득 보이는 처진 어깨,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평소보다도 작아진 목소리 그런 사소한 변화에서 반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더 나서지 않은 것은 성격 탓이다. 반리는 그렇게 치부했다. 셋츠 반리의 세계는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날 때부터 이미 만능이었던 그에게 들러붙는 찌꺼기 같은 사람들을 쳐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필요할 때 쓰이고 지나고 나면 버려지는 자신을 역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타인의 감정을 배제한 채 오로지 자기만족만을 충족시키며. 단지 핑계일 뿐이었지만 반리는 제 이기적인 성격을 그러한 이유로 합리화하며 살아왔다.


그러니까 이 말은 즉, 반리는 츠무기의 개인사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어차피 그는 반리보다도 훨씬 성인이니까. 제 문제 하나쯤은 거뜬히 해결할만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합숙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이면을 보고 난 이후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그를 원망했다. 제 기분은 조금도 모르는 채 창문에 기대어 잠만 자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목구멍이 메스꺼웠다. 마치 츠무기가 마신 술을 자기가 마셨던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선은 변해갔고 이제는 그가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의식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마른 어깨가 더 처져 보였다. 시선이 종종 무의식적으로 츠무기를 쫓다가 문득 그런 자신을 발견하면 속이 뒤틀렸다.


나는 어쩌다가 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약해진 걸까하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볼게. 다들 맛있게 먹어.”

어라. 츠무기 상, 벌써 다 드셨어요?”

배가 불러서. 남겨서 미안해요, 감독님.”


반도 비우지 않은 접시 옆으로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에서 읽히는 미안함은 아마 거짓이 아닐 것이다. 사소한 부분에서도 배려를 우선하는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그의 외로움은 이런 불필요한 배려를 행하는 데서 더 커지는 걸지도 모른다고 감히 타인의 감정에 대해 추측해보았다.


츠무기 상, 요즘 좀 기운 없어 보이지 않아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방에 있을 땐 별로 다를 거 없어.”


츠무기가 남긴 카레를 대신 먹고 있던 타스쿠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를 오래 알고 지낸 타스쿠라면 당연히 비슷하게나마 눈치 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물며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고 있던 다른 단원들 역시도 별 생각 없는 듯했다. 피곤한가보지. 츠무기 상, 생각 외로 체력 약하니까. 그런 식으로 넘어갈 뿐이다. 하긴 그가 밥을 거르는 것쯤이야 예전에도 자주 있는 일이었고, 체력이 약하다는 그 말도 사실이다. 부정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저녁을 마치자마자 츠무기의 방으로 갔으나 부재중이었다. 예상하고는 있었다. 반리는 다른 생각은 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기숙사 앞마당으로 발을 옮겼다.


역시 여기 있었네.”

, 반리 군.”


역시나 츠무기는 그곳에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화단을 돌보는 것을 취미 삼는 건 본인의 컨디션이 어떻든 거르지 않던 사람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내일 오후에 뭐해요? 나 학교 끝날 시간에. 괜찮으면 그때 얘기한 카페 가요. 내가 사드릴게요.”

, 어떡하지? 나 내일 수업 있는데. 화요일은 반리 군 학교 후배 가르쳐주는 날이니까 시간도 딱 겹쳐버려.”

제 후배인 것까지는 관심 없는데요.”


입술을 비죽거리자 츠무기는 살풋 웃어보였다.


하핫. 그럼 목요일이나 금요일은 어때? 그날은 괜찮을 것 같아. 그리고 사줄 필요 없어. 고등학생한테 얻어먹는 취미는 없네요.”

정말? 자주 오는 기회 아닌데?”


츠무기는 손을 내저었다. 돌연 눈웃음 짓는 츠무기의 눈가에 달빛이 스치듯 미묘하게 번쩍였다. 고개를 들자 시꺼먼 하늘 위로 만월이 떠올라 있었다. ‘달 월자를 이름에 품은 츠무기. 달빛을 머금은 그의 눈.


날이 쌀쌀해요. 슬슬 들어가요.”

.”


그런 츠키오카 츠무기가 조금 특별한 존재여서 이런 감정들이 흔들리는 걸지도 모른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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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샹바레 / 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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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Cyp


 비가 내리네—


 건물 밖을 나서려던 발걸음이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가면 닿는 땅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흐릿한 원을 그려냈다. 어쩐지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라니. 최근 들어 부쩍 정신이 멍해지긴 했다만, 먹구름이 그득한데 우산 하나 없이 출근했던 아침의 자신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을 어따 팔고 있는 거람.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어댔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말도 없이 손에 들린 커다란 장우산을 펼치던 그는 드렉슬러를 바라보며 얇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라스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네가 우산도 없이 왔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네.”

 “얼씨구. 대단한 예언가 납셨네.”


 작게 흘리는 그의 웃음 사이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지겹도록 덥기만 하던 계절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버렸나 보다. 정신없던 사이에. 오늘이 며칠이던가—손가락을 꼽아보던 드렉슬러는 결국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은 무슨 어제가 며칠, 아니 무슨 요일이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손을 다시 내려놓았을 때 부스럭, 하고 떨어진 나뭇잎이 밟히는 게 느껴졌다.


 “드렉슬러.”

 “응.”

 “혹시 갖고 싶던 거라든가…. 그런 거 없나?”

 “…….”


 이전부터 로라스는 종종 물어오고는 했다. 아니, 묻는다기보다는 그냥 말하는 것이었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언제든 손에 쥐여주겠다고. 다만 드렉슬러는 그의 말이 맘에 들지 않아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었고. 그 이유는 단지 비슷한 재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위에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다. 그저 알아서 해주기를 원했거나 혹은 말할 수가 없던 것이었다. 원하는 건 손에 쥘 수 있는 물질적인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그가 던지는 질문에도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걷고 또 걷던 두 다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익숙하게 보이는 집 앞 현관문에서 멈추었다. 달리 할 말이 없어 그저 잘 가라는 인사만 남기고 우산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했고, 로라스는 그런 그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

 “아니, 넌 뜬금 없이 왜 그런 걸 묻고 그러냐. 그런 게 생기면 나중에 말할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되네.”

 “왜?”

 “왜라니! 선물은 당일에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건 맞는 말이지…하고 영문도 모르고 납득하고 있던 드렉슬러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그렇구나, 미처 세지 못했던 날짜는 어느덧 달을 넘기고도 사흘이 더 지났었다, 아마도. 내가 태어난 날조차 기억하지 못해 이 사달이 나버렸구나—하고 어이없이 웃어버렸다. 어찌 되었든 최후의 소원을 털어놔야 마땅했다. 이런 날이 아니면 두 사람의 관계에 선을 긋지 못한다. 선 안에 두 사람이 있든지, 두 사람 사이에 선이 그어지든지. 다만 후자의 경우가 두려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것뿐이었고. 차라리 그럴 거면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게 낫다. 내가 원하는 건 ——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민망하니까. 


 “야…너는 본인도 기억 못 하는 나를 위해서 센스 있게 알아서 주면 어디가 덧나?”


 가슴팍을 한 대 퍽 쳤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로라스는 제자리에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물은 됐고 집이나 조심히 가. 그의 얼굴에 대고 손을 대충 흔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로라스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목을 다시 한 번 끌어당겼다. 또, 왜……,


 그리고 입술이 포개어진다. 


 분명 우산 아래로 숨어있는데 온몸이 젖어드는 기분에 손을 꽉 쥐었다. 아, 바라고 있던 게 결국 같은 거였구나. 그걸 느낄 틈도 주지 않고, 눈도 감기 전에 깊은 마찰과 함께 그가 금방 떨어졌다. 감성이란 쥐꼬리만큼도 없는 녀석 같으니. 속으로 투덜거리며 멀뚱히 얼굴을 바라만 보자 그는 예의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항상 주고 싶었던 걸 주는 거라고. 그 말에 드렉슬러는 허, 하고 마냥 웃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해, 바보야. 그러고는 떨어져 나간 그의 뒷목을 다시 붙잡으며 입을 맞추었다. 더욱 진하게, 귓가를 때리는 먹먹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슴 뛰도록. 맞닿은 입술로 호선을 그리던 로라스는 우산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드렉슬러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것이 그들의 첫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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