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와는 달리 평범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평소처럼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제 할 일을 하며 쳇바퀴 굴러가듯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미유키의 태도도 그랬다. 쿠라모치를 대하는 행동과 말이 한 끗 차이도 없이 변함없어서 무덤덤하게 내뱉었던 고백 같지도 않은 고백은 없었던 일인 것 같았다. 덕분에 그 며칠간은 제 자신까지 헷갈려서 정신을 놓는 일이 허다했다. 그때 이미 정신은 잠들어버려서 꿈을 꾼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공기 중에 흩어졌던 목소리도, 제 손에 닿았던 체온도 너무나 생생했다.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그 날의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 버렸다.
계속 생각하다 보니 정말 뻔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쿠라모치가 불만스럽게 쳐다보면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웃어 보였다. 대놓고 물어보려다가도 그 상황을 인정해버리는 것 같아 마음을 고이 접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후덥지근한 여름이 오면서 시험기간이 다가왔고, 미유키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레 접어두었다.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제일 친한 친구이자 동기였고 룸메이트였다. 결국은 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시험 하나를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네."
"아아, 선배, 안녕하세요."
"전달사항 있어서 연락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 근데 너네 정말 붙어 다닌다?"
"하하, 얘 저 없으면 못 사니까요."
미유키가 갑자기 어깨를 확 끌어안자 쿠라모치는 소리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남들 보기에도 충분히 수상쩍어 보였고, 최근엔 그렇게 말을 할 때마다 쿠라모치는 잠시 잊고 있던 얼마 전의 일이 머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괜히 멋쩍어 제 어깨에 두른 미유키의 손을 걷어치워 버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요?"
"별건 아니고 이번 주 금요일에 시험 끝나고 종강기념 술자리 있으니까 너네 학년에 전달해줘."
"그거 다 가야 돼요?"
"응, 특히 너."
과대는 학년 대표니까 꼭 참석해야 된다. 부러 웃으면서 미유키의 어깨를 툭 치고 시야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과대고 뭐고는 둘째치고 큰 자리에서 많은 사람과 어울려 노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에 미유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땅 꺼질라. 한숨 좀 쉬지 마라."
"아프다고 할까?"
"아니. 나랑 같이 있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가방을 고쳐 매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는 쿠라모치의 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별 뜻 없이 말한 걸까, 일부러 생각해줘서 그런 걸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작은 등이 괜히 든든하게 느껴져 앞서 걸어나가는 쿠라모치를 빠른 걸음으로 쫓아 다시 어깨를 끌어안고 크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유키에게는 언제나 적응 안 되는 분위기였다. 어둠 사이로 곳곳이 빛나는 주황색 불빛과 그 조명을 받아 얼굴이 누렇게 둥둥 뜬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우렁차게 터져 나오는 고함과 웃음소리가 뒤섞인 소음. 쿠라모치의 손에 잡혀 억지로 끌려 나오기는 했다만 기어코 구석으로 숨어들어 갔다. 앞과 옆에 앉은 사람들, 심지어 저 건너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과도 호탕하게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제 친구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이래서 맨날 술 취해서 기어들어 왔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괜한 데서 웃음이 터져 애써 감추려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혼자 마시기 있냐?"
"넌 네 친구들이랑 계속 노시죠."
"안돼, 같이 마셔."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쿠라모치가 아직 다 비지도 않은 잔에 술을 콸콸 들이부었다. 어이없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강제로 손에 잔을 쥐여주고는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경쾌한 소리가 시끄러운 공간에 쨍하고 울려 퍼졌다. 단숨에 제 몫을 탈탈 털어 넣은 쿠라모치는 또다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자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같이 있으면 되지는 개뿔. 정말 같이 앉은 것 말고 뭐가 있다는 거야. 쿠라모치가 따라준 술을 뒤늦게 입속으로 들이부었다.
그래도…굳이 싫지는 않았다. 겉모습과 달리 유달리 모난 성격 탓에 사람을 깊게 사귀지 못하고 제멋대로 겉돌던 미유키에게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사람 중 하나였고, 특히 각별한 사람이니까. 같이 있어주겠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그렇게 생각하며 턱을 괴고 제 옆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는 쿠라모치의 옆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천장을 뚫을 정도로 달아오를 때쯤 미유키도 그 분위기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제 주변 친구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술을 조금씩 들이켜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자리를 옮겨가며 어수선한 게 말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쿠라모치는 꿋꿋이 미유키 옆을 떠나지 않았다. 간간이 미유키에게 술도 따라주고 갑자기 어깨동무를 걸어온다든가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부비적 거리기까지 했다.
같이 살고 붙어 다니는데도 이 정도로 술을 마시고 있는 쿠라모치를 직접 본 적이 없던 터라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사실 당황하기보다는 자신이 없는 어딘가에서도 이러고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핀트가 살짝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맘 졸이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작작 마셔, 좀."
"우리 카즈야, 술 안 따라줘서 삐쳤구나!"
술잔을 뺏으려 하니 되려 평소 부르지도 않는 이름까지 부르며 미유키의 잔에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보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얄미워도 진짜로 미워할 수가 없잖아. 평소엔 질 줄 모르던 미유키가 보기 힘든 쿠라모치의 행동에 결국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또 제멋대로 미유키의 잔에 제 것을 짠하고 들이키고 있을 때 갑자기 누가 뒤에서 미유키의 어깨를 확 잡아끌었다.
"선배!"
"으, 응?"
"저 번호 좀 주시면 안 돼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듯한 여자가 핸드폰을 들이밀며 서 있었다. 미유키의 시선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쿠라모치가 미간을 푹 찌푸리더니 미유키의 어깨에 닿은 손을 떼어냈다.
"응, 안돼."
"오빠가 뭔데요?"
미유키에게는 낯설기만 한 여자였지만 쿠라모치는 이미 전부터 알 수밖에 없던 여자였다. 딱히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그가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얼마 전 그 날, 동아리 회식에서 자기에게 찾아와서 미유키 좀 소개해달라며 당당하게 말하던 그 후배였으니 말이다.
그런 속사정도 이 여자가 누군지도 전혀 알 리가 없는 미유키는 오히려 정색하는 쿠라모치의 태도에 더 당황했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은 퉁퉁 부어서는 입을 비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맞받아치자 그 여자는 들이밀고 있던 핸드폰을 거두고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푹푹 뀌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 오빠는 뭐 땜에 자꾸 방해해요?"
"뭐?"
"저번에도 연락 씹더니, 오늘도 그렇고. 둘이 진짜 호모에요?"
큰 소리로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통에 그렇게 부산스럽던 공간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저 멀리서 수군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이쯤 되니 쿠라모치가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들었던 말이어서 자연스레 넘어갈 수 있을 법 한데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베베 꼬였다. 해결하려 해도 문제의 시작점이 지금 이 순간이 아닌 것쯤은 눈칫밥으로 쉬이 알 수 있었다.
"미안, 쿠라모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앞뒤 분간이 좀 안 되는 거 같다. 나중에 보자."
미유키는 씩씩거리는 쿠라모치의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놓으라며 소리를 꽥 지르는 쿠라모치의 뒤통수를 한 대 팍 치자 그제야 순순히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정적이 빈자리를 빙빙 맴돌았다.
"너 진짜 미쳤냐?"
"뭐가."
"술을 마실 거면 곱게 마시던가. 여자애한테 그게 뭐냐?"
"짜증 나는데 어떡해."
"그러니까 뭐가 짜증 나는건데. 저번 일은 또 뭐고?"
캐묻듯이 따지자 쿠라모치는 작게 “아이씨….”하고 욕을 내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몰라도 돼. 집까지 오는 길에 어느 정도 술이 깬 줄 알았는데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는 손은 자꾸 엉뚱한 곳을 쿡쿡 쑤셨다. 미유키는 현관 앞에서 비틀대며 툴툴거리는 쿠라모치의 손에 제 손을 겹쳐 열쇠를 제자리에 꽂아 넣어 주었다. 딸각. 그제야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현관문이 열렸다. 쿠라모치는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버릇처럼 냉장고 안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그래서 말 안 해줄거야?"
"그러면 너는?"
줄곧 풀린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던 쿠라모치가 눈을 치켜뜨며 미유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뭘 묻고 있는 건지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이내 미유키는 작게 웃음을 지으며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뭐?"
"그렇게 말해놓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정말 신경 안 쓸 줄 알았냐?"
어둠 사이로 미세하게 떨리는 쿠라모치의 손이 보였다. 예상은 했는데 직접 말로 내뱉는 걸 들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결국은 줄곧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거잖아. 끈적하게 짓눌리는 더운 공기에 숨이 막혔다. 술이 들어간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들끓어 올라 얼굴까지 후끈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쿠라모치의 시선이, 눈빛이 간신히 붙잡고 있는 끈을 조금씩 갉아 먹고 있었다.
모든 걸 술김이라고 우겨버릴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몸은 이미 쿠라모치를 향해 다가갔고, 미유키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향해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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