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츠무 / 계절이 바뀌는 자리下
“야, 셋츠. 오락실 가자.”
“귀찮아.”
“같이 가자. 수가 안 맞는단 말이야. 마츠다가 쏜대.”
“뭔 지랄이야. 암튼 셋츠 너도 갈 거지?”
어차피 든 것 없는 가방을 정리하던 중, 반 친구들이 몰려와 동행을 요구했다. 친구…라는 이름은 사실 그들과의 관계를 포장하기 위한 그럴싸한 도구일 뿐이었고 반리는 그들을 그저 힘세 보이는 친구를 갈구하는 졸개 정도로 여겼다. 물론 속으로만.
지이잉, 지이잉.
귀찮아진 참에 책상 위에 덮어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의욕 없는 손으로 뒤집은 액정 위로 밤새 곱씹었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 동공이 커진 줄도 모른 채 잽싸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반리 군, 학교 끝났어?”
“넵. 지금 막이요.”
“나 오늘 수업이 취소 됐네…. 벌써 밖에 나왔는데. 괜찮으면 어제 말한 카페 오늘 갈래?”
“지금요?”
“응. 역시 안 될까나? 미안, 맘대로 바꿔서….”
“아니요! 지금 가요!”
순간적으로 소리친 탓에 주변에 몰려있던 녀석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통화를 끝내고는 어쩌냐, 선약이 있어서─라는 변명을 던지고는 제 이름을 불러대는 무리 사이를 빠져나왔다.
반리는 약속한 카페 근처까지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면 도착지다. 골목의 끝에 멈춰서고는 가장자리에 우뚝 서있는 도로반사경으로 제 꼴을 바라보았다. 급히 걷느라고 흐트러진 머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내가 왜? 라는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 코너를 돌면 츠무기가 서있다. 그의 앞에서 급하게 온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말하자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언제나 여유 있어야할 셋츠 반리가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그 여유를 잃어버린다니 그런 모습은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거다. 그래서 그런 거라고 반리는 또 한 번 자신을 합리화했다. 온통 모순투성이인 자기합리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불량한 학생을 츠무기는 언제나 그렇듯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계산의 몫은 결국 츠무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무리 반리 군이 돈이 많더라도 어른의 자존심은 지켜주길 바라. 계산대 앞에서 던져진 그의 단언이었다.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반리의 명백한 패배였다.
“츠무기 상한테 지는 건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 효도놈한테 지면 얼마나 빡치는데요.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말지.”
“그런 말 하면 못써. 예쁜 말.”
예쁜 말 대신 반리는 입술 앞으로 들이밀어 진 빵조각을 넙죽 받아먹었다. 어린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부모처럼 츠무기는 흐뭇하게 웃었다.
“맛있다. 오늘 세상에서 제일 단 초코빵 먹었다고 효도놈한테 자랑해야지.”
“둘이 사이좋네.”
“우웩. 절대 아닌데요. 츠무기 상이랑 타스쿠 상에 비하면…아니 비할 것도 못 되지. 아무튼 사이좋아질 예정도 없습니다요.”
“에이, 나랑 타스쿠는 이 정도로 오래 알고 지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은데. 우리도 자주 싸우는걸.”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서로 고민이나 비밀 얘기도 많이 하고 그럴 거 아니에요.”
“꼭 그렇진 않아. 가끔 고민걱정 털어놓다가 나약한 소리한다고 혼날 때도 많으니까. 물론 타스쿠가 위로 같은 게 좀 서툴러서 그렇긴 하지만. 그래서 잘 안 해.”
“그럼 그때 울었던 것도 얘기 안 했어요?”
“…어, 응?”
커피잔을 든 츠무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일순 당황한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양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 죄송…. 못 들은 걸로 해요.”
“아니야. 난 네가 왜 말 안 꺼내나 했어. 음…, 그날 사실 기억이 중간중간 끊겨서…. 울었던 건 생각나는데 나 왜 울었을까.”
“외롭다고 했어요.”
“…….”
착각이 아니었다. 츠무기는 전에 보였던 처연한 눈이 다시금 흐트러졌다.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던 것이 반리의 말 한 마디에 불쑥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괜한 소리를 했네. 미안해.”
“됐어요. 그래서 뭐가 그렇게 외로운 건데요.”
“그냥 환절기라 그런가 봐. 가끔 감기 걸리듯이 감정적으로 우울해질 때가 있거든.”
“연애 같은 게 하고 싶은 거예요?”
또 한 번 손이 잠깐 멈추었다가 아까보다는 좀 더 금방 제자리로 돌아갔다. 반리는 이럴 때면 직설적인 제 성격을 탓하게 된다. 이제는 난감하다기보다 복잡하다는 게 더 알맞을 듯한 표정을 읽어버린 바람에 더 그랬다. 그런데도 이다지도 착한 츠무기는 제 얘기를 조곤조곤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걸 잘 모르겠어. 인생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 적도 별로 없지만 문득 연애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전부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관계 있잖아. 가끔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어. 그런데 내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연애를 한다면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애초에 내가 외롭다고 느끼는 감정들이 그 때문만은 아니니까. 그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찾아온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숨이 턱 막힌 듯 말을 멈추었다. 그 사이 식었는지 옅은 김을 뿌리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냥 그런 거야. 굳어 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어쨌든 연애하고 싶다는 말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거야?”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츠무기 상 맘인데. 심리학도라면서 자기 맘도 잘 모르네.”
“원래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알기 어려운 법이거든.”
…저는 당신을 제일 모르겠는데요. 반리는 식은 커피를 들이마시며 하려던 말까지 전부 삼켜냈다. 그 바람에 한입에 꿀꺽 잔을 비우고 말았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미 달력이 한 장 넘어가 버린 요즘은 제법 일몰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는 했다. 오묘한 색을 띠는 하늘 위로 어설픈 원을 그리고 있는 달이 떠있었다. 아직 해가 다 지지도 않았는데.
“반리 군이랑 있으면 뭔가 맘이 편한 것 같아.”
“그래요? 그거 참 영광이네요.”
“하하, 얼른 가자. 저녁 시간 놓치겠다.”
츠무기의 검푸른 머리 위로 노을이 쏟아졌다. 한 올 한 올 반사되는 주홍빛을 바라보자니 어쩌면 아까 츠무기가 했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곳곳에서 쏟아지기 시작해 점차 굵어지고 내일 새벽까지 밤새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오전 6시에는 그칠 전망이지만 비와 함께 기온이 내려가 오늘 날씨보다 쌀쌀할 것으로 예상되오니 외투를 잘 챙기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버스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온다. 반리는 온전한 제 음악 감상 시간이 빗소리나 여타 소음들에 묻히는 것이 싫어 진즉에 이어폰을 빼버린 상태였다. 허공을 긋는 빗줄기 사이로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수증기에 부딪히는 소리들이 울려 소란스럽다. 그럼에도 어딘가 적적한 것은 가을비가 내리는 날의 통상적인 기분이었다.
지이잉-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누나였다. 지금 막 그녀의 부름 때문에 집에 다녀오는 길이니 당연히 안부인사 혹은 감사인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가는 중이야? 노트북 또 안 되는데. 제대로 고친 거 맞아?”
“뭐?”
“괜찮으면 다시 좀 와줄래? 나 일 때문에 급해.”
“내가 무슨 엔지니어야? 그냥 AS 부르라니까. 바빠, 끊어.”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누나에게 큰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날씨의 영향으로 인한 우울감이 짜증으로 번졌다. 그런 와중에도 맘속으로 어딘가 미안함이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참 역설적인 감정변화였다. 다음에 집 갈 때 디저트나 사가지 뭐. 언제나 결론은 가볍게 끝맺게 된다.
반리는 비로도웨이 근처의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집에서 아무 우산이나 집어온 바람에 평소에 들고 다니는 잘빠진 색상이 아닌 거무죽죽하고 둔할 정도로 큰 우산을 펼쳐 들었다. 기숙사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안 저처럼 우산을 놓고 나왔으나 미처 임시방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겉옷이나 가방을 방패 삼아 급히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하나같이 일기예보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무심한 삶 속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반리는 유독 군중들과 동떨어진 모양의 사람을 발견했다. 비 내리는 날엔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공원 끝자락의 나무 아래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우뚝 서있는 남자를.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가 누구인지는 언젠가도 본 적 있는 눈을 통해 확신했다.
“여기서 뭐 해요.”
“어…….”
“…울어요?”
“…….”
“이거 잠깐 들어봐요.”
들고 있던 우산을 츠무기의 손으로 건네주었다. 날씨도 추운데 셔츠 한 장 달랑 입고 미련하게 비는 다 맞고 있고 뭐 하는 거예요, 진짜. 반리는 재킷을 벗어 축축한 어깨 위로 덮어주고는 우산을 다시 뺏어 들었다.
“괜찮아, 이런 거 안 빌려줘도. 나 이미 다 젖었는걸.”
“감기 걸리면 걱정하는 사람들 한둘 아니에요.”
“…….”
“가요.”
“아니야, 먼저 가. 난 이따가 갈게.”
“뭐? 진짜 감기 걸리려고 작정했어요?”
“…있지, 반리 군.”
어딘가 지금의 이 날씨와 어울리는 눈이 다시 빗방울 가득한 허공을 향했다. 본 적 있다고는 하지만 그때와는 짐짓 다른 분위기였다. 공기가 바닥으로 내려앉은 듯한 극한의 중력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약간의 침묵 끝에 츠무기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우울해졌을 때, 그 공허함을 기억해놓으면 언젠가의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거야. 걱정하는 건 알아. 하지만 내 감정이고 인생이고 어차피 맘대로 떨쳐낼 수 없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맞닥뜨리는 수밖에 없어. 나는…그래. 그니까 너무 그러지 마.”
절로 한숨과도 같은 탄식이 튀어나온다. 화인지 짜증인지 혹은 동정인지 뭔지 모를 감정들이 무심코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억눌러야 했다. 이제는 고민하기엔 너무나 명확해져 버린 더 큰 감정이 존재하기에.
정말요, 당신은, 당신은…,
“진짜 바보예요? 언제까지나 혼자만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요. 이미 나한테 털어놓았던 것만으로도 나는 당신한테 어느 정도 관여할 권리가 생긴 거예요. 물론 나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데 나답지 않게 신경을 썼던 그 시점부터 나는….”
츠무기 상을 좋아하게 돼버린 거라구요.
“그러니까, 나한테라도 기대란 말이에요.”
빗줄기가 굵어졌다.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는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큰 우산 아래에 있어도 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빗물이 다 쳐들어와 머리카락이며 웃이 젖어들었다. 엉망진창이었다. 아직도 츠무기가 우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웃는 건지도, 알아 듣기나 했을는지도, 무엇 하나도.
“…돌아가면 목욕부터 하는 거예요.”
“…….”
“알았죠?”
“응.”
다행히도 손목을 잡고 끌어내자 그는 순순히 발을 뗐다. 돌아가는 동안의 적막을 먼저 깬 것은 츠무기였다. 반리 군, 화난 거 아니지? 안 났는데요. 화나 보여. 누나 심부름 다녀오는 길이라 좀 짜증 난 상태긴 해요. 화 풀어. 화 안 났다니까? 그러자 그는 예의 항상 그리는 웃음을 지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얼굴을.
돌아가던 시선의 끝에 항상 걸쳐있던 그 존재가 무슨 의미였는지 막 깨달은 이때 반리는 그가 좋아진 이유를 하나둘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가령 지금처럼 다투다가도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화하는 부분이라든지, 언제나 자기보다 남을 생각하는 지나친 배려심이라든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도달하는 건 아무래도 그거였다. 부드럽게 지어 보이는 한없이 예쁜 미소.
반리는 제 이기적인 세계에 누군가의 침범을 처음으로 허락하는 참이었다.
∗∗∗
“야, 창문 닫아. 비도 오는데 추워죽겠네.”
“추우면 네가 닫아.”
“뭐? 게임 하는 거 안 보이냐?”
“…….”
저게 씹네. 투덜거리면서도 게임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FEVER모드일 때 제일 집중해야 한다고…. 판 끝나면 효도 자식 결판 내줘야지. 이따위 생각들을 하며 액정을 마구 때리는 도중에 갑자기 화면 한가운데로 LIME 알림창이 떴다.
“아…….”
메시지 3개가 연달아 떴다가 금방 사라졌음에도 반리는 멍하니 손을 뗀 채였다. 기분 나쁜 효과음과 함께 죽어버렸다. 얼마 안 가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좀 전과는 다른 발신자였다.
「야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너 때문에 졌잖아」
「미안미안 나 피곤해서 그냥 끌게여 담판은 이기십쇼」
이타루에게는 대충 에둘러 핑계를 댔다. 아무래도 츠무기한테 메시지가 온 시점부터는 게임을 더 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게 됐다. 것도 미리보기 창으로 떴다가 사라진 글자들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반리 군 오늘 고마웠어.」
「생각해봤는데.....아직은 잘 모르겠지만....나 아까 조금은 설렜던 거 같아」
「음 너무 신경 쓰진 마. 잘 자~」
대화창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들여다봤다. 이건 청신호인 걸까.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 잇새를 타고 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혼자서 비실비실 웃어대는 모습에 쥬자가 “미친 놈”이라며 진저리를 치더니 창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런 재수 없는 룸메이트는 안중에도 없는 반리는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할지 이 말 저 말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메시지 하나만 보내고서 핸드폰을 탁 꺼버렸다. 어쩐지 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설마 감기인가. 아니, 꼴에 어울리지 않는 답장을 보내서 알아서 소름 돋은 걸지도 모른다. 다른 말 하나 없이 「♥」 하나만 덜렁 보내버렸으니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창피하니 얼른 자버리자. 목덜미가 뜨거워진 것을 느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속으로 잔상처럼 남은 츠무기의 얼굴을 그리며 눈을 꾹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