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Cyp

벨져릭 / 봄

김신비님 2015. 7. 2. 18:33

 낡은 축음기에서는 미디엄 템포의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 멜로디를 배경음 삼아 한가로이 책을 읽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면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것들을 귀 뒤로 넘겨주곤 했다.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책을 읽는 남자를 담은 풍경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세월이 꽤 흐른 듯 빛 바랜 종이 끝을 잡고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종이 위로 울퉁불퉁한 느낌이 선명해졌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글씨를 천천히 읽어내려갔지만, 못내 신경을 끌 수 없어 종이 몇 장을 휙 넘겼다. 그러자 그사이에 껴 있던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져 날렸다. ㅡ날렸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분홍빛의 꽃잎이 앉아있었다. 다시 책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똑같은 모양새의 꽃잎이 너덧 장은 더 자리 잡고 있었다. 


 답지 않게 섬세한 구석이 있었나ㅡ


 책 속에 있은 지 오래된 듯했다. 그러나 뻣뻣하게 굳어있음에도 제 색을 찬연하게 빛내는 것을 보니 새삼스레 현재의 계절과 맞물리는 것 같았다. 여전히 재즈 음악이 가득한 공기 중에 끼익ㅡ하는 문소리가 침범했다.


 “밖이 이렇게나 화창한데 안에만 있을 거요? 잠깐 산책이라도 갔으면 하는데.”

 “나갈 채비를 하도록 하지. 그나저나 톰슨, 이건 뭐지?”

 “음?”


 벨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 책 사이로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릭은 금세 다시 미소 지었다.


 “그런 속설이 있다오. 떨어지는 꽃잎이 바닥에 닿기 전 손에 잡으면 사랑이 찾아온다고.”

 “…….”

 “오래전, 내가 꽃잎을 그렇게나 많이 잡았다오. 놀랍지 않소?” 


 탁. 책을 거칠게 덮으며 인상을 구겼다. 미련하다, 다 큰 남자가 그런 미신이나 믿다니. 약간 성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말과 행동이 조금 어긋난 모습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릭은 갈라질 듯한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거 아시오?”

 “…….”

 “내가 저 꽃잎들을 잡고 난 뒤 얼마 안 돼서 그대를 만났소. 다섯 장이나 잡고서는 그대 같은 남자를 만났으니 딱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았소. 릭은 항상 저런 의연한 얼굴로 벨져의 속을 뒤집어 놓고는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어린 애가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런 릭에게 넘어가 버린 자신이 더 미련한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를 만나 사랑하게 된 일은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위대한 가문에서 태어나 억압 아닌 억압 속에서 자라난 그에게 릭 톰슨이라는 자유로운 영혼은 자신의 재산이나 권력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이고 선물이었다. 


 이따금 그가 없던 삶을 되돌아보고는 했지만, 그가 없는 미래는 예상할 수 없었다. 호화로운 집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것도 그 마음에서 기인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굳이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미 제 옆에 봄이 서 있는데. 그래서 벨져는 그 ‘봄’을 확 끌어안았다. 그 사이로 빈틈이 하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맞닿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지금 흘러나오는 음악이 두 사람의 모습을 노래하는 듯했다. 그가 없던 삶이 날카로운 추위에 둘러싸인 겨울이었다면 지금 그리고 더 나아갈 미래는 영영 봄이리라.